2024.03.2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36)

0 “엄마는 우리에게 신화를 남기고 가셨다.”

 

뜬금없이 오빠가 말했다. 나는 오빠를 따라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길을 따라 노란 애기똥풀이 피어있었다.

 

“애기똥풀로부터 사열을 받고 있는 것 같네.”

 

오빠와 나는 콩열매 같이 가늘고 길쭉하게 매달린 애기똥풀 씨방 하나를 만져보았다.

 

“이것도 폴록폴록 말랑말랑하지 않아? 아기살처럼.”

 

나는 엄마가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풍선덩쿨을 만지고 있는 듯 애기똥풀을 맞이하고 있었다. 문득 삶은 맞이하는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맞이하는 것이란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살짝만 눌러도 터질 걸? 노랑물이 나와. 마치 애기똥 같이.”

 

오빠는 평소 오빠답지 않게 소년처럼 나를 앞질러 시골 좁은 길을 달렸다. 어릴 적 엄마랑 갔던 강촌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달려가는 오빠 등 뒤에 나는 소리를 질렀다.

 

“버스는 운전해봤어?”

 

오빠는 대답 않고 몇 발짝 앞으로 더 달리더니 돌아서 뒷걸음질로 다시 달렸다. 고개를 저으면서, 두 팔을 펼치면서.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족해.”

 

오빠가 몸을 휙 돌리더니 내게로 달려와 나를 안았다. 내 볼에 키스하듯 입을 맞췄다. 간지러웠다.

 

“애기똥풀의 꽃말이 뭔지 아니?”

 

오빠에게 안긴 채로 나는 대답했다.

 

“알지. 흔해서일까? 잡풀로 무시했는지 꽃말을 찾아봐도 없던데. 그래서 내가 붙여줬어. ‘숨겨둔 사랑’ 어때?”

 

“그래? 난 찾았는데. ‘몰래 주는 사랑’이래.”

 

나도 오빠를 꼭 껴안았다.

 

“내가 얼추 맞췄구나. 숨겨둔 사랑이나 몰래 주는 사랑이나 엇비슷한걸. 근데 오빠도 꽃을 좋아했어? 자동차만 좋아하지 않았나?”

 

규범은 떠올렸다. 동생 귀희의 우표첩에 그림으로 피어있던 꽃들로 엄마나 많은 상상여행을 떠났던가. 규범에게 상상은 현실도피였다. 현재를 잠깐 잊게 해주는 상상은 지겹도록 가벼운 현실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오빠가 가슴을 떼며,

 

“귀희야, 오늘 우리가 돌아가는 시간은 늦은 저녁이면 좋겠다.”

 

규범은 달맞이꽃이 피어나는 밤을 귀희와 함께 하고 싶었다. 엄마를 흙으로 돌려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달맞이꽃밭을 지난 적이 있었다.

 

“엄마 무덤은 여기서 한참 더 가야해? 나도 이 길이 길면 좋겠다. 까불어대는 오빠를 더 볼 수 있을 테니깐. 우리가 한 번이라도 이래 본 적이 없었잖아. 오빠, 이 길이 긴만큼 지금의 행복도 길어지겠지?”

 

 

 

 

도착한 곳은 교회수련장으로 쓰고 있는 폐교였다. 보통 학교가 그렇듯이 낮은 언덕 위에 있었다. 단층의 일자형 건물은 아담해서 학교라기보다는 작은 박물관 같았다. 운동장도 작은 편이었다. 대문 없는 교문의 오른쪽 담장을 따라 오빠가 들어갔다.

 

“여기다. 엄마가 계신 곳이.”

 

“우리를 또 기다리고 있는 엄마자리?”

 

규범은 삼일장도 치루지 않은 엄마를 화장한 뒤 이곳으로 모셔왔다. 모두 혼자 했다. 아버지 문재수와 상의할 생각도, 상의를 해봐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아들인 규범이 네 생각대로 해라.’

 

이렇게 나올 아버지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또 아버지에게 욕이나 들어붙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것은 자신에게 쏟아내는 욕일 것이기에. 아버지를 닮은 제 모습이 싫었다.

 

오래 전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하루 종일 잠을 자고 난 어느 날이었다. 깨어보니 엄마가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깼니? 바지가 많이 해졌더구나.”

 

규범은 덜 뜬 눈을 비비며 짜증을 부렸다.

 

“놔두세요. 다 해지면 버리고 새 것으로 사면 되니까요.”

 

한소연은 아들에게,

 

“여자친구는 있니? 사랑은 해봤어? 이 엄마는 고시를 준비하던 때 네 아빠를 만났었지. 고시라는 것도, 합격이란 것도, 출세라는 것도 다 잃어도 좋을 만큼의 사랑이 나에게 찾아왔다고 여겼지.”

 

규범은 모로 돌아누워 엄마에게 등을 보였다.

 

“그래서요? 그 사랑이 어때서요? 그래서 지금 만족하세요?”

 

소연이 웃는 소리를 규범은 등으로 들었다.

 

“너희들을 만나게 해준 사랑이잖니. 내가 당시 고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래, 솔직히 시간벌기로 사랑을 늦췄다면 너희들과 만날 수가 있었겠니? 더 큰 것을 얻은 거지, 아니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하나를 얻으려면 더 많은 것을 버려야한다는 것을 알게 한 사랑이었지.”

 

규범은 얼굴만 돌려 소연을 쳐다보았다. 엄마를 바로 바라본 적이 언제였던가. 엄마의 얼굴이 초췌해보이고 수척해보였다. 늙어보였고 측은했다. 그래서 규범은 화가 났다.

 

“엄마 삶은 없어요?”

 

소연이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려하자 규범은 도로 얼굴을 돌려 엄마에게 머리꼭지를 보였다.

 

“왜 없겠니. 인간은 살아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던가? 내게 물어보곤 한단다. 무엇 때문에 태어났니? 하고 말이다. 언젠가는 올 죽게 되는 날, 너는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긴 게 있니? 하고 말이다. 남긴 것? 난 대답했지. 바로 너희, 규범이와 귀희지.”

 

규범은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요. 그게 엄마의 삶이냐고요.”

 

소연은 대화를 바꾸고 싶었다.

 

“허리가 몇이니?”

 

규범이 뉘인 몸을 세우고 일어났다.

 

“엄마, 이제 만족하세요? 아들이 엄마 대신 고시에 합격했으니.”

 

소연은 아들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마저 공부해서 지금 규범이처럼 사시에 합격했다면? 이런 부질없는 과거를 현재로 돌이켜본 적이 있단다. 돌아보고 후회하기? 다 부질없는 거지.”

 

“후회하세요? 그렇게 들리네요.”

 

“아니. 그 때 엄마의 결정은 대단히 잘 했다고, 그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너희들을 만나면서는 오히려 후회는커녕 잘 했다고 여겼지. 처음엔 결혼 후 달라진 너희 아빠의 탓이라며 화도 많이 났지만 그런 진모습을 결혼 전에 보지 못한 내 잘못이 더 크기에 내 탓으로 받아들였다. 선택은 내가 했고 결정 또한 다 내가 한 일인 것을. 단지 생활이, 관계가 너무나 가벼워지는 게 참으로 싫었단다. 관계라는 단어 자체가 그렇듯이 상호적이고 보완적이어야 하기에 일방적이거나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 쏠려서는 안 되는데 그래도, 적어도 관계에서는 약속이 있을 테고 그것을 지켜나가려는 예의가 있어야 할 테고 그러려면 성격이나 성품이나 능력은 달라도 진지함만은 서로 공히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사랑이 관계가 되니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이 또한 다 내탓이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니, 규범아?”

 

규범은 화가 나면 옆에 놓인 아무 책이나 드는 습관이 있다.

 

‘그는 천성적으로 일로서 글을 쓰고, 보도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다. 혁명, 글쓰기, 시 등은 모두 그가 삶 속에서 찾는 즐길거리들이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고, 악당에게 잡힌 여자를 구출하고, 사자를 사냥하고, 비행기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등의 일이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그는 원한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자기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재앙을 겪을 때조차 그것을 즐겼다. 그는 언제든지 자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돼버린다.’

 

책을 읽던 규범이 내지르는 ‘씨발’소리에 소연이 옴칠했다.

 

“그런 욕도 할 줄 알고 내아들 규범이가 멋지네.”

 

규범은 더 화가 났다. 욕이라곤 그것밖에 몰랐다.

 

“멋져요? 욕이요? 그럼 엄마도 하세요. 담고만 살지 마시고요. 우리에게나 아빠부터요. 그러고 싶잖아요, 엄마는. 품위가 떨어져서요? 왜 속이고 살지요? 그거 자기기만이고 가면의 삶인 거, 아세요?”

 

소연이 끄덕였다.

 

“그래, 규범이 말이 맞다. 가면의 삶. 그렇구나. 그랬구나, 내가.”

 

규범도 소연도 잠깐 말을 멈췄다. 남에 대한 비판은 자신을 돌아보는 자각이다. 방금 전에 본 엄마의 초췌한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이 났다. 자기 삶마저 희생하고 사는 엄마가 측은했다. 서울법대 교수 중엔 엄마와 동기동창생이 둘이나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대단한 엄마였다고 엄마를 추켜세웠다.

 

‘그 대단한 엄마가 왜 집에만 처박혀 있는지 도대체 우린 이해가 안 된다. 엄마는 대학 때 우리의 전설이었거든. 특히 남학생들의 우상이었지. 똑똑하지 예쁘지. 역시 그 여자의 그 아들이야.’

 

엄마가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다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규범은 엄마에게서 등을 진 얼굴에 흐느낀 눈물로 대답했다.

 

“사랑은 하나이고 싶은 것 아니겠니? 그래서 더 외롭고 더 아픈 게 아닐까.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게 사랑이란 걸 알게 해주는 것도 사랑이니까. 엄마는 그 사랑을 너희에게 옮겨보고 싶었는데 역시 하나가 되기엔 사랑은 본래부터 적절하지 않은가봐.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로 가게 할 뿐인 게 사랑인가 보더구나. 그래서 외롭고 슬프고 아프긴 해도 사랑이라고 여기니 또 흐뭇하고 고맙고 그러니 견디게 하고 말이다.”

 

“오빠, 뭘 생각해? 엄마? 그렇다면 나도! 내가 엄마에게 너무 못되게 굴었지? 미국으로 도망가기까지 해버렸으니. 그 뒤 연락도 끊고.”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오빠는 나를 울게 내버려뒀다. 보고 싶어 울고 보지 못해 흐느낀다. 나는 울었고 오빠는 흐느꼈다.

 

“이게 묘라고? 엄마의 무덤이 여기에 있다고? 수목장 뭐 그런 거야?”

 

나는 엄마의 무덤에서 엄마를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죽은자를 가둬두는 무덤이란 형식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엄마를 보기엔 이르다. 내년 여름이 돼야 엄마를 만날 수가 있을 거야. 엄마는 죽어서도 기다리고 계신 거지.”

 

오빠는 담장 아래의 땅을 가리켰다.

 

“여기에 풍선덩쿨의 씨앗을 심었단다. 씨를 뿌리기 전에 엄마를 여기에...”

 

이제 오빠가 소리 내어 울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보고 싶어서 울고 또 보지 못해서 운다. 볼 수 없기에 소리라도 내고 울어대야 한다. 오빠가 코를 훌쩍거리며 흐느끼더니 눈물소리로 울음을 그쳐갔다. 나도 따라 그쳤다.

 

“오빠, 우리 이젠 슬프지 않기로 했잖아. 근데 왜 이곳이야?”

 

“엄마가 보낸 거겠지. 우연히 알게 된 목사, 귀희도 알겠구나. 내가 묵고 있는 교회의 그 목사야. 목사가 이곳을 안내했단다. 난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목공선생으로 통하지. 아이들이 필요한 것들을 나무로 만들어주고 있거든. 그래서 아이들이 붙여준 이름이 목공선생이야. 뭐 특별히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자격선생이라는 거지 뭐.”
“이 수련장에서의 일 때문에 오빠 사무실도 군하리로 옮긴 거야?”

 

규범은 ‘손수건 안의 인생’을 상기했다. 약간의 공간과 음식과... 충분하다던 삶. 하지만 영혼은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삶.

 

“이제 주업이 목공이고 부업이 변호사다.”

 

“엄마의 죽음 때문이야?”

 

규범은 감옥에 들어가야 했던 일을 귀희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 때문이지.”

 

“엄마가 그립구나?”

 

“사랑이 그리운 거겠지. 그래서 여길 왔고. 나는 여기서 만나는 꼬마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거든.”

 

“오빤 결혼한 줄 알았는데...”

 

오빠가 웃어보였다.

 

“했지. 사랑은 해봤으니깐. 귀희 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할 거야. 그런 거.”

 

우리 남매는 오던 시골논길을 거슬러 걷고 있었다. 왼쪽으로 노을하늘이 붉다.

 

“시작도 끝도 같다, 그치?”

 

오빠가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여줬다. 뜨는 여명이나 지는 황혼은 다 뜨거움으로 같았다. 시간에 몰입하는 것도 같다. 시간은 공간으로 채워졌다.

 

“곧 어두워지겠네. 저녁이 우리에게 돌아왔어.”

 

“그렇구나 어느 새. 우리가 갈 곳으로 가는 중이란다. 너랑 이 꽃을 함께 보고 싶었거든. 내 중학교 친구가 있었단다.”

 

오빠는 세종과의 인연을 달맞이꽃밭으로 가는 길에 얘기했다.

 

“그 놈은 저기 달님에 먼저 가 있을 거야.”

 

덜 찬 보름달이 동쪽 산등성에서 막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 흙 속에 머물러있는 엄마는 봄과 여름에만 찾아오겠지, 우리에게 엄마가.”

 

“엄마는 참 바보야. 기다림은 결국 맞이해야 하는 거 아냐? 맞이하지도 못할 거면서 왜 기다린 거야, 엄마는.”

 

“엄마는 기다림이란 신화로 사신 거지. 이루면 신화는 될 수 없잖아. 신화니까 더 오래 남게 되는 것이고. 신화로서 남겨놓고 싶었던 건가봐.”

 

말없이 걸었다. 신화가 된 기다림은 짧은 것도 긴 것도 없다. 남겨질 뿐이다.

 

“봐봐. 저기 폈네.”

 

노란 꽃들이 모여 활짝 피어있었다. 달맞이꽃임을 멀리서도 알아보았다. 달맞이꽃에 다가가며 오빠는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 꽃의 전설을 들려주고 있었다.

 

“인디언마을에 로즈라는 어여쁜 소녀가 살았데. 이 인디언부족은 해마다 태양이 하늘에 가장 오래 떠있는 한 여름에 열다섯 살 되는 마을 처녀를 결혼시키는 풍습이 있었어. 열네 살의 로즈는 그 해의 결혼축제가 끝난 뒤 일 년 후 자기 짝은 누가 될까 가슴을 졸이며 밤하늘에 밝게 떠있는 달님에게 소원을 빌고 있었어. 로즈는 달을 무척 좋아했거든. 그 때 먼 길을 다녀오느라 축제에 참석치 못한 추장의 아들을 만나게 되었어. 달님에게 멋진 짝을 보내달라고 소원을 빌고 있는데 나타난 추장의 아들은 참으로 자기가 원하던 멋진 남자였어. 그들은 이후, 달이 밝은 밤이면 종종 만나곤 했고 세월이 지나 다시 축제의 날이 돌아온 거야. 로즈는 당연히 추장의 아들이 자기를 선택하리라고 기대했겠지? 하지만 로즈의 마음과는 달리 추장의 아들은 다른 처녀를 골라 결혼을 하고 말았어. 로즈는 당황하고 실망했고 맘에도 없는 다른 남자가 자기를 짝으로 원했기에 황급히 그곳을 도망쳐 나왔지만 바로 붙잡혀 부족의 법을 어겼다 해서 깊은 산속 귀신의 골짜기에 갇히게 되었데. 로즈는 매일 밤 달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긴긴 세월을 보내야 했어. 추장의 아들을 잊지 못하고 말이야. 세월이 지나 다시 축제의 여름이 왔어. 한동안 로즈를 잊고 있던 추장아들이 문득 자기를 사랑하다가 산 속으로 추방된 그녀가 궁금해졌다네. 아마도 신혼의 단맛을 잃어가고 있을 즈음이겠지? 벌써 두 해가 되도록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그녀가 살아있기나 할까 걱정하던 추장아들은 그녀를 찾아 떠났어. 깊은 밤에 도착한 귀신의 골짜기에는 달빛이 휘영청 밝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대신 늦은 밤에도 이름 모를 꽃들만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더라는 거야. 추장아들은 그제야 깨달았어. 달을 좋아하던 그녀가 달이 빛나는 밤에 피는 달빛 노란꽃으로 변했구나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꽃으로 변한 그녀를 볼 수도, 안을 수도 없었지. 그 꽃도 연인으로서는 만나지 못하는 추장의 아들을 꽃으로만 보고 있으려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이런 아픈 사연을 갖고 있는 꽃이 바로 저 꽃이야.”

 

우린 어느 새 달맞이꽃밭에 와 있었다.

 

“그래서 달맞이꽃이잖아. 낮엔 오므렸다가 밤에만 활짝 피는 꽃.”

 

나는 아는 체를 했다.

 

“달맞이꽃의 꽃말이 뭔지 오빠는 알아?”

 

“물론이지. 기다림!”

 

“말없는 사랑이란 꽃말도 가지고 있는데.”

 

나는 더 아는 체를 했다.

 

“엄마도 그 인디언소녀 같이 그 달맞이꽃 같은 신화를 우리에게 남겨놓으신 거라고 생각하지 않니? 기다리기만 한 여자이자 엄마.”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이내 가로로 흔들었다.

 

“신화라기보다는 전설 같은데. 엄마는 정말 바보야. 우리가 마냥 어린애인 줄만 알았나봐.”

 

“우리가 어른이 돼 있을 때는 우리가 너무 커서 엄마 곁에서 멀어졌잖니.”

 

“그러니까 엄마는 바보지.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신화로 남겨둔 게 아니라 한없는 기다림은 그저 아픔일 뿐이라는 전설로 남겼으니까. 안 그래, 오빠생각은?”

 

“그런가? 그래도 난 신화로 받아들이고 싶어. 엄마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잖니.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질문을 주고 가셨잖니? 엄마는 오래 전에 내게 그랬단다. 귀희는 미국에 가고 없을 때였지. 자기에게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자기감동은 타인을 감동시키는 원천이라고.”

 

“나도 알아. 엄마 일기에서 읽었어.”

 

“신화지 않니? 전설이나 우화 같진 않아.”

 

“오빠는 엄마를 신비롭게 보고 싶은 거로구나.”

 

“우리를 위해 자기 삶을 포기하고 희생한 엄마를 우리가 모르는 척 할 순 없지 않겠니? 이건 신비가 아니라 삶의 모델을 보여주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오빠는 지방으로 내려온 거야?”

 

“서울이다 지방이다, 장소의 문제는 결코 아니지. 어떻게 꾸려가는냐,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 아니겠니? 나를 이 정도 키워놨기 때문에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걸 거야. 나를 방치했다면 나는 내 몫도, 내 역할도 모르는 체 제 멋에 빠져 살고 있을지 모르지.”

 

“아빠를 두고 하는 말 같네. 아빠처럼? 근데 아빠는 어디서 사셔? 연락은 해?”

 

“전화연락도 없다. 내가 하면 받을 뿐인데 나도 안 하니 자연스럽게 남이 되어가네. 이 관계의 가벼움에 엄마는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까. 아빠의 자유엔 자기편의가 너무 심해. 아빠지만 이런 남자 정말 혐오스럽다.”

 

“그래도 뵙고는 가야 하는데. 그래도 우리 아버지잖아. 엄마와 화해하고 있듯이 아빠를 만나면 아빠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오빠가 관계의 가벼움이라고 했지? 입장이 달라서 그런 거 아닐까?”

 

“말 잘했다. 귀희가 방금 ‘우리 아버지잖아’ 했듯이 왜 아빠는 ‘그래도 내 자식이잖아. 내 아내잖아.’ 이러지 못하는 걸까? 자식도 이러는데. 입장으로 헤아리고자 하는 배려가 없는데 어떻게 관계가 이뤄질 수 있겠니. 아빠는 자기본위 외엔 없는 듯해.”

 

오빠가 일러준 전화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는다. 세 번째야 전화를 받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은 지금 주무십니다. 용무가 있으면 나중에 해주세요.”

 

“안 받네. 아빤 밖에서 선생님으로 통하는가 보네.”

 

“여자 목소리가 들린 것 같던데. 밖에선 인기 있을 거야. 웃기는 거지. 안에선... 그만 두자.”

 

“아빠는 우리에게 우화를 남기고 있는 건가 그럼?”

 

“우화? 그런 건 없어. 아빠는 자신밖에 모르는 극히 인간적인 사람이지. 동물이나 돼야 우화에 등장하지. 아빠의 유일한 선물인 우표첩은 인간이기에 아버지로서 할 수 있던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일 것이고. 그것도 즉흥적이었겠지. 인간적이란 즉흥적인 거잖니. 하지만 우리는 그 우표첩으로 환상하며 환영을 보려 했던 것이고.”

 

“아빠도 나름 신화가 되어줬네.”

 

오빠는 화를 버럭 냈다.

 

“엄마를 모독하지 마. 두 분 다 가면을 쓰고 살았다 해도 엄마에겐 진정성이 있었어. 고민하고 아파하고 애쓰고 슬퍼한 그 진정성 말야. 아빠는 지금 어디에선가 여자가 됐든 남자가 됐든 누군가와 점잖고 의젓한 웃음을 팔고 있을 거야. 씨발!”

 

수화기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글.그림=오동명/ 마지막 편( -1)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31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