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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29)

7 규범은 엄마의 전화마저도 받지 않았다. 소연은 구치소에서 한 달 만에 나온 아들에게서 짧은 문자 메시지를 한참 후에 받았다.

 

찾지 마세요.

 

규범은 중학교 때의 친구를 찾아 나섰다. 1학년 겨울방학이 오기 며칠 전 고세종은 작은 아버지가 사는 정선으로 전학을 갔다. 그 후론 못 본 친구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다 잃은 세종은 언제나 혼자였다. 하교 때 앞에 걸어가는 세종에게 규범이 말을 걸었다.

 

“집이 어디니?”

 

규범을 쳐다보면서도 세종은 대답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난 신당동에서 사는데. 우리 집 동네 쪽으로 가는 너를 본 적이 있다. 그 근처니?”

 

세종이 쳐다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규범도 더 묻지 않고 그의 곁을 따라 걸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세종이 멈췄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가려나 보다, 하고 규범이 그가 탈 버스가 오기를 같이 기다렸다.

 

“안 가니?”

 

비로소 세종이 입을 열었다.

 

“너 타는 거 보고 갈게. 우리 집은 여기서 가까워.”

 

번호가 다른 버스들이 몇 대 멈췄다가 사람을 부리고 태우고 떠나는 동안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길 건너의 한 상점 앞에선 미니스커트 차림의 두 여자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여는 가게의 홍보도우미들은 나이가 비슷해 친구처럼 느껴졌다.

 

“우리도 춤춰 보지 않을래? 저 누나들처럼 말야.”

 

규범이 뜬금없이 든 생각을 말하자 세종이 돌아 말끄러미 쳐다보며 피식 웃어보였다.

 

“저 버스야. 나, 갈게.”

 

규범이 세종을 따라 붙으며,

 

“나도 타보고 싶다. 네가 타고 다니는 버스!”

 

세종이 대꾸 없이 버스로 다가갔다.

 

“학생 둘이에요.”

 

버스표 두 장을 요금통 안에 넣고 나서 세종이 맨 뒷자리에 앉았다.

 

“넌 춤도 잘 춰?”

 

공부를 잘 하는 규범을 의식해서 세종이 하는 말임을 알아챘다.

 

“한 번도 안 춰 봤어. 단지 너랑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나랑? 왜?”

 

버스가 섰다. 여중생 세 명이 수다스럽게 버스에 올라타며 그들의 앞에 섰다.

 

 

“어이, 뒤에 여중생들. 조용히 해야지. 너희들이 전세 낸 버스가 아니잖아. 요즘 애들은 되먹지 못하게 막 키워놔서 남들 불편은 전혀 생각지도 않는다니까.”

 

버스운전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치는 순간 버스가 좌우로 크게 흔들리자 여중생들이 놀란 듯 소리를 질러댔다.

 

“아저씨. 난폭운전으로 불편신고를 해버릴 거예요.”

 

기사의 퉁명스런 그리고 불분명한 말소리가 전해왔고 이내 버스가 얌전해졌다. 규범이 세종에게 들릴 듯 말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꿈이 버스운전기사였는데.”

 

“니가?”

 

세종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규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랑 나랑 친구잖니.”

 

규범이 멈칫하다가 춤춰도 되는 이유를 늦은 듯하게 말했다.

 

“우리 집은 정릉이야. 정확히 말하면 큰 이모네 집이지만. 너희 집에서 꽤 먼데 어디까지 갈 거니?”

 

“네 집까지.”

 

“안 돼. 이모부님이 싫어하실 거야. 대신 다른 데엔 갈 수 있어.”

 

“어디?”

 

불현듯 규범은 세종이 측은했다.

 

“엄마는? 아빠는?”

 

세종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앞서 걸었다.

 

“내가 노는 자리가 있어. 농구공도 숨겨놨지. 어서 와봐.”

 

세종을 따라간 곳은 사람의 발길이 드문 정릉의 안 쪽 외진 평지였다. 농구공을 숲 속에서 가지고 나왔다.
“농구대도 없는데? 저런 곳에 놔두면 누가 훔쳐가지 않니? 집에 안 놔둬?”

 

“농구공이라고 농구만 하란 법, 누가 만들었다니. 이 공도 내 꺼 아냐. 이 근처서 주운 거야. 봐봐. 난 이것을 핸드볼처럼 놀아. 자, 받아봐.”

 

주거니 받거니 앞으로 달리며 공을 돌렸고 뒷걸음을 치며 공을 나눴다. 규범이 땅바닥에 덥석 주저앉았다.

 

“아, 오늘은 과외를 빼먹고 말겠는걸.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세종이 규범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괜히 날 따라 왔나보다. 지금이라도 어서 가봐.”

 

“아냐.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인걸. 우리 축구나 농구 같은 새로운, 우리만의 공놀이 하나 만들어볼까?”

 

규범이 일어나 씩씩하게 엉덩이를 털었다. 굵은 나뭇가지를 집어 땅바닥에 선들을 반듯하게 그었다. 그리고 양쪽에 웅덩이를 팠다. 마치 농구바구니처럼.

 

“규율을 정해볼까? 보통 구기게임은 주어진 시간에 볼을 골 안에 몇 개 넣는냐로 승부를 가리지만, 그러나 우린 이렇게 해보는 거야. 열 번을 누가 먼저 넣느냐, 어때? 빨리 끝날 수 있지만 끝내지 않고 한없이 놀 수도 있잖니? 공을 골 안에 넣으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말야. 농구공을 축구공처럼 손으로 굴리기도 하고 골프공처럼 구멍에 넣기도 하니 종합 스포츠, 아니니? 농구는 다섯 명, 축구는 열한 명, 한편이 이렇게 숫자로 묶이지만 이 공놀이는 둘만이 아니라 혼자서도 놀 수가 있어. 물론 한 팀이 열 명이 될 수도 있고. 이렇게 놀면 돼. 봐봐. 시합이 아니라 노는 거지.”

 

규범은 언제 한번 이렇게 놀아본 시간이 있었나, 생각하며 다시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라고 중얼거렸다. 한참 따라 하던 세종이 놀 공간이 좁은 듯하니 더 넓히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 그게 좋겠어.”

 

또 그렇게 한 시간을 놀고 있는 동안 사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떠올랐다.

 

“난, 가봐야 할 것 같아.”

 

규범이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동안 중학생 두 명은 말이 없었고 걸음도 무거웠다.

 

“내일 또 올 수 있니?”

 

하지만 규범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 못할 거야.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특별한 날은 자주 있는 게 아니잖니?”

 

다음 날 교실에서 세종이 쉬는 시간에도 책을 파고 있는 규범에게로 다가갔다.

 

“어제 우리가 같이 논 공놀이 말야. 그 놀이에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어.”

 

잡고 있던 책에서 손을 떼고 그 손으로 세종의 손등을 살며시 톡톡 거리며 안녕 친구, 라고 하며 규범이 새삼스럽게 인사를 했다.

 

“농구 같은? 축구 같이?”

 

“응. 어제 밤새 생각해봤는데 네 이름 한 자하고 내 이름 한 자를 떼어서 범종구라고 해봤는데, 네 생각은 어떻니?”
범종구? 범종구? 두어 번 새겨 입으로 불러보던 규범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놀이는 혼자 논다는 네게 내가 준 선물이야. 그러니 난 종구라고 하면 더 좋겠어. 종일 놀 수 있는 놀이잖아.”

 

규범은 읽고 있던 책으로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 참. 넌 공부를 해야 하니까.”

 

“어제 학원 안 간 거, 엄마가 아셨어.”

 

세종이 고맙다며 작은 초콜릿 봉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쪽지가 한 장이 초콜릿봉지에 끼어있었다.

 

이 봉지 열 장을 모으면 해태과자공장을 견학시켜준데. 한 사람이 다섯 장이니까 열 장을 모으면 우리 둘이 함께 갈 수 있거든.

 

규범이 읽고 또 읽다가 쪽지를 가지런히 접어 바지주머니 속에 넣고도 손을 빼지 못하고 만지작만지작거렸다. 초콜릿을 입 안에서 우물우물거렸다. 일주일이 지난 즈음 체육시간이라 운동장에서 였다.

 

“세 장만 더 모으면 돼. 규범아, 너 그 한 장, 버리진 않았지?”

 

세종이 엄지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쭉 펴 보였다.

 

“열 장은 벌써 넘었겠는 걸? 내게도 일곱 장이 모아졌거든.”

 

그렇지만 규범의 얼굴은 밝게 웃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주면 그 공장견학행사도 끝난다고 하더라. 수학경시대회와 겹쳐서 난 갈 수가 없어. 미안해. 세종아.”

 

시험은 토요일 오전에 있었다. 규범은 해태제과에 전화를 걸었다. 견학은 토요일 오전까지만 가능했다.

 

“세종아. 토요일 아침 아홉 시에 정릉행 버스가 오는 그 정류장에서 만나자.”

 

“뭐? 학교는? 그리고 너, 경시대회가 있다고 했잖아.”

 

“아무튼 그 시간에 보는 거다. 넌 학교 빠지고 할 수 있지?”

 

“나야 뭐. 근데 네가 학교 대표로 나가는 대회가 아니니?”

 

“특별한 날은 우리, 너와 내가 만드는 거야. 알지? 그 때 보자. 더 특별한 날에.” 글.그림=오동명/ 6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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