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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28)

8 “고마워.”

 

아들이 석방되는 날, 한소연이 안수철에게 이 말을 하면서 두 눈을 적셨다.

 

“갈취하기 위해 부부가 사전에 짜고 문 검사에게 접근한 사실을 확인하는 게 힘들었다. 당사자인 문 검사가 부인하니 어찌 해볼 도리가 있어야지. 소연이도 잘 알다시피 아주 애먹었다. 우리 법조계에서 다 아는 사실인데, 비슷한 경우를 당해 곤욕을 치룬 재판장이 이 사건을 맡은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지. 근데 소연이가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아들을 엄청 바보로 키워 놨더구만. 끝까지 그 꽃뱀 여자를 감싸며 사랑한다고 해대니. 하기야 이래서 언론들도 악의에서 선의의 기사로 돌아서긴 했지만. 언론은 순수한 검사를 현대판 이수일로 몰아 독자의 흥미를 끌어내고 있지만, 어떻게 그 사랑이 순수하달 수 있겠는가. 철딱서니 없는 짓이지. 문 검사는 사귀는 온전한 여자가 없나? 허우대도 멀쩡하더만.”

 

한소연은 듣고 싶지 않았다. 허우대? 안수철을 쳐다보았다. 비만한 몸에서 비대한 권위가 보였다. 가식적인 웃음을 섞은 그의 말이 가증스럽게 들렸다. 인사치레를 해야 했다.

 

“내가 알아서 더 줘야겠지만, 이곳의 관례 정도로 끝내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소연은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라고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번 일에도 남편 문재수는 무관심했다.

 

“난 내 아들을 전적으로 믿어. 당신을 믿듯이. 당신이 잘 키워왔잖아.”

 

전화로 해올 뿐 재판과정도 묻지 않았고 재판장에도 나와 보지 않았다.

 

‘내가 이 사람을 남편으로 어떻게 맞아들일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묻다가도,

 

‘내 결정인 것을. 내가 다 감수해야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자신을 한소연은 더듬거렸다. 그녀는 결혼 후 가정의 모든 일을 다 떠 맡기고 제 일에만 전념하는 문재수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것은 자신을 아우르려는 자기방어와도 같았다. 남의 이목을 무시하고 결정한 결혼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일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는 데에 있다고 보고 자기의 삶을 온통 아이들에게 쏟아 부었다.

 

“네가 이루지 못한 일을 자식에게서 보상 받고자 하는 것 같다.”

 

부모와 형제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서,

 

‘당신들이 사랑을 알아?’

 

한소연은 자식에게 올인하며 집착했다. 결혼 후 문재수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안수철을 바라보았다. 비만한 몸에서 풍겨 나오는 비대한 권위의 한 남자와 무책임한 행동에서 나오는 포장된 가면의 또 다른 남자가 오버랩되며 거드름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남자는 다 그래?’

 

유행가의 가사 따위를 입에서 절로 내뱉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조소를 띄고 있는 게 느껴졌다.

 

“섭섭하군. 내가 그까짓 돈 몇 푼에 한소연을 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나? 변호비용? 그까짓 것, 내겐 없어도 그만인 푼돈이다. 좋아. 그렇다면 술이나 한 잔 사지 그래. 이건 거절하진 않겠지?”

 

 

 

안수철은 소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검정 세단에 한소연을 태웠다. 그는 시디플레이어를 눌렀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들려왔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를 쳐다보자 그의 흰 머리카락이 눈이 띄었다.

 

‘저 흰 머리가 없었다면?’

 

변호사라는 사회적 계급이 세어 세월과 권위가 얹혀 있었다. 검정 세단은 서초동 법원에 세워둔 그녀의 팔백 시시 경차와 비교되었다. 입시생들의 집을 여기저기 오고가며 밥벌이 발이 되어준 작은 차에서 왜소해져버린 자신을 보았다. 가정을 위해 벌이를 포기한 무능가장이 흰 머리를 검은 색으로 염색하고 다니는 몇 해를 되돌아보게 했다.

 

“염색 같은 것 않고 자연스럽게 늙겠다더니.”

 

소연이 묻자 재수는,

 

“늙는다는 것과 추한 것은 다르지. 남자의 염색은 여자의 화장과 같은 거야. 당신도 화장은 하잖아?”

 

그녀는 못마땅한 어투로 대꾸했다.

 

“인테리어하고 사는 몸을 예술로 삼는 것 같다.”

 

세단은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최선의 방어는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일이다. 최악의 공격은 자신을 감추는 일이다.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이지?’

 

가는 초승달이 방금 전 넘어간 해를 따라 서쪽 하늘의 수평선으로 기울고 있었다. 저무는 달에게 묻는 듯 제 자신을 더듬었다.

 

‘제대로 살아온 거니?’

 

딸 귀희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그녀가 제게 물었던 질문을 하고 있었다. 자식과 대화는 얼마나 하고 살았나, 물었다. 자신과의 대화는 있었나? 소연은 또 물었다. 자식에게든 자신에게든 대화가 아닌 웅변을 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변가가 그렇듯이 자신이 무대 위에 놓여졌다.

 

‘합시다. 해야만 합니다.’

 

그녀 자신이 무대 뒤의 현수막 같이 보였다. 웅변가가 없는 연단이 보였다. 연단 앞에는 제 말을, 제 주장을 들어주려는 청중이 하나도 없었다. 메아리로 돌아오는 자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아온 여자가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잘 보입니까?’

 

여러분 역시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제야 안철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이렇게 멀리 가죠?”

 

소연은 수철이 동창이란 생각이 처음으로 들지 않았다. 잃어버린 젊음은 젊을 땐 혐오했던 권위로 메워졌다.

 

‘그 때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

 

나도 늙었구나, 60대의 소연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세월은 거슬러 다르게 각색되어질 수도 있었다. 세월은 현재에 의해 만들어진다. 타인에 대한 불만족은 또 다른 타인에게 멋으로도 옮겨질 수 있었다.

 

“안 변호사는 원하던 것들을 다 얻고 사는 것 같군요.”

 

수철은 웬 존댓말이냐며 대응하면서 소연의 왼쪽 허벅지 위에 오른손을 뻗어 내려놓았다.

 

“다 얻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다 내가 챙기며 사는 것이지. 인생이란 그런 거 아냐?”

 

“삶을 쟁취했단 얘긴가요?”

 

다듬어 만들어진 안수철의 외양에서 중후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으며 몸의 더 깊숙한 곳으로 그의 손을 들이밀었다. 그녀가 그의 손등을 잡으며 멈추게 했지만 멈추게 할 만큼 강하진 않았다. 힘은 상대적으로 기울었다. 그의 손에 더 힘이 붙었다.

 

“오늘은 나도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아요.”

 

이미 소연의 얼굴이 붉게 젖어들고 있었다. 차는 방향을 바꿔 안수철의 별장이 있는 홍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연이 눈을 감았다. 문재수가 나타났다.

 

“우리 사이에 결혼을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결혼이란 단지 관계를 결속시키면서도 단속하는 울타리에 불과한 거니까. 시골 다방의 디제이로 사는 것을 내가 포기할 수 없다는 얘기야. 그래도 좋다면 결혼은 할 수 있지. 소연이가 여전히 판사가 되고 싶은 것과 같은 거지. 아닌가? 내가 틀렸나?”

 

“우리, 우리의 아이부터 갖자.”

 

소연이 진심을 털어놓았다. 재수를 받아들이면서 다 잃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여자가 되고 싶어. 엄마가 되고 싶다고.”

 

 

 

수철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소연에게 40년 만에 남자가 된 기분이군. 내가 널 좋아했던 건, 아니?”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그것을 감아 말았다. 그녀는 딴 남자의 입술을 받으며 결혼과 동시에 상실한 여자가 되살아 여자의 몸으로 상기되며 굳어지고 있는 제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버려뒀다.

 

“너랑 결혼했을 거야, 네가 내게 문을 열었더라면.”

 

만약이란 현재의 언어가 못 된다. 수철이 소연에게 ‘지금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면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말해봐야 소용없는 부질없는 만약을 앞세우는 것은 현재를 과거가 농락하는 일이다. 과거로 현재를 현혹하려드는 수단에 불과하다. 소연은 자신이 비참하단 생각에 초라해졌다.

 

“일어날래. 이제 가봐야겠어.”

 

그녀는 차문을 열고 뛰쳐나와 찻길로 내달렸다. 검정 세단이 묵직하게 그녀 옆으로 권위나 권력처럼 다가왔다.

 

“왜 그래? 아들을 구해준 보답이 고작 이런 거야?”

 

소연은 수철에게 욕을 퍼부어댔다.

 

“가 새끼야. 넌 대학 때나 지금이나 더티한 놈이야. 변한 게 없어. 니 목적을 위해선 무엇이든 해댔던 졸개 나부랭이니까. 지금 네 삶이 니가 입고 있는 비싼 양복이나 승용차처럼 상급이라고 여기고 사는가 본데, 어림없지. 동창으로서도 이제 넌 아냐, 인마. 가 버리라고, 의식부재의 꼴통 허수아비 새꺄.”

 

“내가 뭘 잘못했다고 품위 없게 욕지거리냐? 별안간. 뜬금없이 이게 뭔 짓이야? 좋아, 가서 마시자던 술이나 마시자고. 순순히 잘 따라왔으면서. 내가 꼬셨어? 니 발로 따라왔지? 어서 타.”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러나 싫다. 싫다고. 다들 가버리라고 제발!”

 

소연은 마침 뒤에 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문재수의 화실이 있는 서교동으로 가자고 했다. 창문 안으로 여고생들과 함께 있는 남편 재수가 보였다. 그는 제자들과 얘기를 나누며 밝게 웃고 있었다.

 

‘내가 저 웃음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지?’

 

문재수는 한소연에게 불평의 어떤 말이나 어떤 행동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다 네가 잘 알아서 하니까.’

 

또 다감하게 말을 걸어오거나 살갑게 몸으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딸 귀희가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어느 날 불쑥,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섹스는 없을 것.”

 

이라며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여자가 생긴 거니?”

 

“유치하군.”

 

소연은 모욕을 참으며 굴욕적인 말을 내뱉어서라도 관계를,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아빠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줘.” 글.그림=오동명/ 7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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