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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준의 '아버지로 살기, 아버지로 죽기'(7)···친구 순정의 아버지, 김진홍 님

그분과 처음 만난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우연찮게 친구 순정이네 집에 놀러갔는데 그분이 나를 무척이나 반기셨다. 순정이나 친구들 말로는 ‘생전 없던 일’이라 했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질 때쯤 친구들 몰래 나를 부르시더니 다짜고짜 말씀하셨다.

 

“우리 순정이 어떵(어떻게) 해보라!”

 

영문을 몰라 멍한 눈으로 쳐다보는 나에게 그분은 아들을 부탁하셨다. 공부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는데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그렇다고 머리 다 큰 놈 두드려 팰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면 반항만 할 것 같아 부탁하는 것이니 순정이와 사귀면서 공부 좀 같이 하라고 부탁하셨다. 얼떨떨했다. 순정이와는 별로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분을 처음 뵙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분은 나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순정이와 어울려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면 모든 지원을 다 하겠다고 하셨다. 아예 여름방학 동안 순정이와 함께 과수원에 가서 같이 공부를 하라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내놓으셨다.

 

어머니마저 여의고 집도 절도 없이 혼자 떠돌며 삼순구식하는 내게 일단 숙식을 해결해 주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순정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섣불리 접근했다간 순정과 멀어짐은 물론 친구들에게 찍힐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당시 순정의 주위에는 껄렁껄렁 거리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은 나를 곱게 보고 있지 않았다. 부모도 없는 주제에 공부한답시고 그들과 멀리 하는 나를 고운 시선으로 볼 리 만무했다. 그런 상황에서 순정까지 그들과 떨어놓으려 한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런저런 생각으로 내가 망설이자 그분은 당신이 시켰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방학 동안만이라도 과수원에 가서 같이 공부해보자고 권해보라고 하셨다. 너무나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 바람에 나는 한 번 얘기해보겠다고 대답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친구들이 돌아가고 난 후, 혼자 남아 순정에게 아버지의 계획―그분의 부탁대로 내 뜻인 것처럼 말한 것은 물론이다.―을 말하자 순정은 망설였다. 그도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쉽게 결단을 못 내리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을 포기하고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잡는 일이 그리 쉽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사실 그대로를 그분께 알렸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쉽게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순정이의 마음을 돌려 같이 공부하라고 내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엇나가는 아들을 위해 아들 친구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그분의 몸가짐은 마치 위대한 스승한테 아들을 부탁하는 부모의 자세처럼 간곡하기만 했다. 나는 그분의 그런 태도를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거나 숙식이나 해결해주면 감지덕지할 놈이라고 얕잡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런 나의 낌새를 느꼈는지 그분은 당신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덧붙이셨다. 순정이가 가끔씩 내 얘기를 해서 나를 궁금해 하고 계셨고, 놀러 와서 인사를 드리는 순간 순정이를 이끌어줄(?) 친구로 낙점하셨단다. 중학교 때 학교에 남아 혼자 공부했다는 얘기를 듣고 보통내기가 아니란 생각을 하셨고, 고아인 상황에서도 엇나가거나 포기하지 않고 독학한다는 말을 듣고 대견해 하셨단다. 그러던 차에 놀러 왔다고 당신네를 찾아와 절을 하는 모습에서 반하셨단다. 순정이 친구라 해봐야 몰래 와서 놀다가 도망치듯 몰래 돌아가는 게 상례인데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 모습에 순정이를 맡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하셨다.

 

간곡한 그분의 간청에 나는 어떻게든 순정이와 함께 공부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버려진 채 진흙탕 속을 뒹굴고 있는 나를 진주로 봐주심이 고마웠고, 자식을 위해 몸을 낮춰 간곡하게 부탁하는 모습에 진한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귀한 대접은 그 어떤 유혹보다도 달콤했다. 그분 곁에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런 분을 아버지로 둔 순정이라면 삶의 길을 함께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순정이를 설득하기보다 나의 상황을 알리려고 했다. 공부하자고 그를 설득하는 일보다 나의 상황을 알림으로써 그의 측은지심을 자극할 심산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그가 말했다.

 

“겅허믄(그러면) 우리집에 왕 이서라(와 있어라).”

 

“너네 집에 와 있고 싶어도 친구들이 자꾸 들락거려서 공부할 수 있겠나?”

 

“거믄(그러면) 어떵할 말이냐(어떡하잔 말이냐)?”

 

“우리 둘이 너네(너희) 과수원에 틀어박혀 이서보카(있어볼까)?”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결국 내 술수에 넘어가 그 여름방학 동안 과수원에서 함께 지냈다. 그렇게 시작된 순정과의 동행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티격태격 감정 충돌도 많았고, 다툼도 많았지만 끈끈한 남자의 정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또한 순정이 아버지 그분을 내 아버지로 여기며 살고 있다.

 

30년 동안 내가 그분에게서 배운 것은 너무도 많다. 내게 긍정적인 아버지상이 있다면 그분에게서 거의 전부를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분은 내 마음 속의, 살아계신, 진정한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어허, 참!”

 

그분의 말씀은 이게 전부였다. 마치 이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더 이상의 말을 아끼셨다. 누가 무슨 얘기를 해도 묵묵히 듣기만 하셨고, 마지막엔 이 한 마디로 정리하시곤 하셨다. 어처구니없는 경우에도, 황당한 경우에도, 화가 날 때도, 곤란할 때도 그분은 이 한마디로 모든 말을 대신하셨다. 하지만 표정만은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그분의 표정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 말의 의미가 무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특히 자식들과 관계된 일에는 일체의 표현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자식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누구보다 알뜰살뜰 자식들을 보살폈고, 자식들을 위해서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표현을 전혀 하지 않고, 티내지도 않으셨다. 젊은날 친구 순정이 방황할 때도, 짝을 찾지 못해 혼자 늙어갈 때도 그분은 순정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무심한 척, 무관심한 척했지만 어느 누구보다 아들을 걱정하셨다.

 

“우리 순정이 어떵(어떻게) 해보라!”

 

내가 찾아갈 때마다 아들을 걱정했고, 친구들이 나서서 좀 도와주라고 부탁을 하셨다. 물론 순정이가 없을 때만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순정이는 모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자식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는지, 얼마나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곧 알게 된다. 그런 그분의 모습을 뵐 때마다 나는 자주 생각하곤 했었다. 순정이가 없는 곳에서 순정이를 부탁하듯이, 내가 없는 곳에서 순정과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성준이 잘 해주라.”란 말을 수도 없이 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내 앞에서는 표현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쑥스러워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아버지의 깊은 정. 나는 아버지의 정을 그분에게서 배웠고, 그 드러내지 않는 깊은 정이 진정한 아버지의 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그분을 뵐 때마다 나는 산을 떠올리곤 한다. 어느 날, 집 뒤에 있는 백마산을 바라보다 떠오른 시상은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그분의 영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

 

 

 

山은

 

높건 낮건

 

山으로 살아간다

 

 

 

없는 듯

 

제 자리에서

 

풀과 나무를 키우고

 

새와 짐승을 품어 기르며

 

구름

 

몰래 덮어

 

가리고 지켜준다

 

 

 

가슴

 

드러내지 않고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마른 헛기침이나 하면서

 

돌아앉아 혼자 눈물 훔치면서

 

 

 

흐음,

 

무뚝뚝함

 

표현하지 않는

 

가슴앓이로 조용히 늙어간다

 

그분은 하루도 집에서 쉬는 날이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이면 20년 넘은 고물 오토바이―박물관에 보내면 큰 대접을 받을―에 몸을 싣고 밭으로 나가셨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밭에 무슨 할 일이 그리도 많은지 밭에서 사셨다. 그분의 부지런함과 근면함은 마을이 다 알 정도였다. 그래서 그분의 별호는 ‘돈방석’이다. 부지런 하나로 돈방석에 앉은 사람이란 뜻이다. 다른 일에 한눈을 파는 적도 없으셨고, 약주를 즐기지도 않으셨다. 오로지 부지런함과 근면함으로 가족과 가정을 지키는 그분이야말로 ‘드릇고냉이’에다 ‘과수원 강생이’셨다.

 

‘드릇고냉이’는 ‘들고양이’란 뜻이다. 우리 마을에서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한 어른의 별호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밭에 나갔다가 달이 뜨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들(밭)에서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그분을 얕잡아 부르는 별호다. ‘과수원 강생이’는 ‘과수원 강아지’란 뜻이다. 과수원을 지키는 강아지처럼 집보다 과수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뜻으로, 역시 우리 마을 한 어른의 별호다.

 

사람들은 ‘드릇고냉이’와 ‘과수원 강생이’를 놀림감으로 삼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결코 부끄러운 별호가 아니다. 오로지 근면함 하나로 많은 재산을 일궜으며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운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버지가 아닐까 한다. 물론 구두쇠란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지만, 부지런함과 근면함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부지런함과 근면함의 상징으로 이 두 별호를 붙여주고 싶다. 물론 두 별호에 내포되어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뺀, 부지런함과 근면함의 대명사로.

 

이성준은?

 

=제주 출생. 제주대 국어국문학과를 거쳐 단국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작가회의, 단국문인회 회원이다. 제주와 경기도에서 20여년 간 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시인으로도 등단, <억새의 노래>, <못난 아비의 노래>, <나를 위한 연가>, <발길 닿는 곳 거기가 하늘이고 세상이거니> 등의 시집을 펴냈다. 최근엔 창작 본풀이 <설문대할마님, 어떵 옵데가?>와 소설집 <달의 시간을 찾아서>를 내기도 했다. <이청준과 임권택의 황홀한 만남>, <이야기로 풀어가는 우리 시조>, <읽기만 하면 기억되는 고사성어 365>, <글쓰기의 이해와 활용>, <통섭의 자리에 서서> 등 다양한 전문서적을 펴내기도 했다. 1년 전 고향 제주에 돌아와 제주 관련 글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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