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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19)

17 “네 아버지는 제주인이다.”

 

셀마는 엄마 헬레나로부터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고 어른으로 성장했다. 죽기 불과 며칠 전에,

 

“제주도는 한국에 있는 섬이다. 하지만 네 아버지는 한국인으로 살기보다는 제주인으로 살다 죽었다.”

 

라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 고희수에 대해서도 별 다른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제 나라를 자기 나라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람. 그러면서도 미치도록 끔찍하게 제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 그 사람을 엄마는 6일 간 만났고 그런 그 사람을 이후 평생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됐다고 했다.

 

“그 사랑이 너, 셀마다.”

 

광주 충장로에서 처음 만난 뒤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줄곧 고희수는 그 거리로 나갔다. 헬레나도 따라나섰다. 6일째, 희수는 여느 때와 달리 물구나무선 뒤집은 몸으로 거리를 두 팔로 걸으며 외쳤다.

 

“한국인이 한국사람들을 죽였다. 살인자는 웃고 살해자는 울어야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한국인이 한국백성들을 죽였다. 살인자는 웃고 살해자는 울고. 이 땅에선 이런 일이 계속 되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희수는 술이 마시고 싶다고 했다.

 

“헬레나, 술을 마실 수 있느냐?”

 

“물론이다. 희수, 마시고 싶은가?”

 

“술을 아직 마셔본 적이 없다. 마시고 싶어도 무엇을 마셔야할지 모르겠다.”

 

 

“희수, 그 말은 네가 네 나라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 같이 들린다. 어떻게 사랑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들린다. 그럼, 술은 내가 고르겠다. 한국 소주가 좋을 것 같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즐겨 마신다고 해서 몇 번 마셔보았는데 꽤 괜찮더라. 신맛 나는 양주 같다. 내 입엔 소주가 식초처럼 시었다.”

 

희수가 소주 10병을 검은 비닐봉투에 넣어 들고 왔다.

 

“이걸 다 마시려고 하느냐?”

 

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흰 비닐봉투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은 녹두빈대떡이 들어있었다.

 

“이렇게 함께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사왔다. 헬레나 입맛에 맞으면 좋겠다.”

 

“막걸리랑 먹어본 적이 있다. 옥수수빵처럼 구수했다. 나중에 막걸리랑 먹어보자.”

 

희수가 헬레나를 반듯하게 쳐다보았다.

 

“나중에?”

 

헬레나는 희수와 함께 미국에 가고 싶었다.

 

“내일, 나는 서울로 가야한다. 할 일을 마치려면 이틀 걸릴 것 같다. 희수, 너와 같이 미국에 가려면 내가 군인신분으로 당분간 남아있는 게 유리하다. 이번에 우리, 미국으로 함께 가자. 꼭 그러고 싶다.”

 

희수가 첫 잔을 다 들이켰다.

 

“나도 신맛이 난다. 술맛이 원래 다 이런가?”

 

“알코올이 들어있으니 그렇겠지만, 다른 술로 신맛을 느껴본 적은 없다. 소주에서만 유난히...”

 

“미국에선 어떤 술을 마시느냐?”

 

“난 선인장으로 빚은 술을 좋아한다. 멕시코산 데킬라다.”

 

“난 비교할 술이 없다. 이번이 처음이니 뭐가 더 좋고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미국으로 가자.”

 

“술 때문에 미국으로 가자고?”

 

“너, 희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양성의 경험이다. 네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것이 네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너뿐만이 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한국인들은 한국 것이 최고라고 잘 말한다. 이러면서 남의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배타적인 민족이다. 내가 네게 주고 싶은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다양한 것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미국이다. 미국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세계를 보게 해주고 싶다. 저기 세계지도를 벽에 붙여놓고만 있으면 뭣하나. 나가라. 나가서 봐라.”

 

희수가 고개를 저었다.

 

“세계를 갈망해서 저 지도를 붙여놓은 게 아니다. 내 고향이 내게는 세계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 내 세계의 중심이 내게는 엄청나게 크지만 남에게는 역시 엄청나게 작다는 것을 저 큰 세계지도가 말해준다. 우주가 아무리 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저 작은, 그러나 내겐 너무나도 큰 그 섬에 난 가지도 못하고 있다. 삼십여 년째.”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느냐? 왜 갈 수 없다는 것이냐?”

 

희수가 소주 두 잔을 거푸 들이마셨다.

 

“그것이다, 바로.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내 자신이 바뀔 수 없는 것이 있다. 네가 말하는 다양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슬픔이 된 아픔, 눈물이 된 상처를 넌 아느냐? 저 세계지도가 아픔도 상처도 다 하찮은 것이라고 나를 일깨워주길 바라서 붙여놓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달라진 것은 없다. 하루하루 떼어내는 일력 같은 것이다. 떼어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매일이 하루일뿐이다. 그런데, 너, 헬레나가 나를 지금 흔들어놓고 있다.”

 

“너는 어떤 이유에서든 미국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 그러다가 미국인인 나를 만나서 그런 것 아니냐? 단지 내가 미국인이라서.”

 

희수가 빈 잔을 채울 땐 소주 한 병이 다 비어졌다. 다시 잔이 비자 헬레나가 희수의 잔에 새 소주병으로 술을 따르며,

 

“나는 너, 희수가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희수가 헬레나에게서 소주병을 건네받아 헬레나의 빈 잔을 채웠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제주도인일뿐이다. 광주인이 한국인이 아니고 호남인인 것처럼. 이 나라 이 땅에선 그렇다.”

 

헬레나가 아껴마시듯 반 잔쯤 술을 입에 털고,

 

“한국인, 제주도인? 지금 내겐 관심이 없다. 넌, 남자다. 남자로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뜨거운 가슴을 지닌 남자, 당신 고희수다.”

 

헬레나가 희수를 안으려하자 몸을 뒤로 빼며,

 

“남의 아픔을 만만하게 보지 마라. 아픔이 동정의 대상은 아니다.”

 

“나도 안다. 아픔은 사랑이다. 사랑이 크면 아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도 할 줄 안다. 비록 미국인이더라도. 너희 동양은 신학도 철학이더라. 정확히 말하면, 신학이 철학의 일부분이더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활이 철학이더라. 서양에는 없는 생활철학이라는 용어도 있더라. 서양에선 사랑은 아름답다고 하는데 동양에선 사랑은 아프다고 한다. 이해 못했다. 하지만, 너를 만나고 이것을 알아가고 있다. 너를 절대 만만하게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반대다. 너를 사랑한다. 아픈 남자여서가 아니라 아파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사랑해, 희수.”

 

헬레나가 다시 희수를 안으려하자 역시 희수가 몸을 뒤로 빼며,

 

“미국이, 맥아더가 한국을 사랑했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었을 것이다. 아픔으로 동냥 받고 싶은 마음, 나, 희수에겐 없다. 제주도인의 피를 가진 나, 고희수는 그런 동냥을 받을만한 가슴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다. 동냥한국은 있을지 몰라도 동냥제주는 없다.”

 

희수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헬레나가 다시 안으려했다. 희수가 이번엔 몸을 뒤로 빼지 않고 헬레나의 가슴 속에 두 얼굴을 파묻었다.

 

“마이 베이비.”

 

헬레나도 울었다. 희수는 흐느꼈다. 희수의 몸이 뜨거워졌다. 뜨거운 몸이 떨었다. 헬레나가 느끼고 희수의 입을 입으로 맞췄다. 희수는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아들였다.

 

“헬레나, 나 같이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돼.”

 

“불행이 불운한 것만은 아니다. 행복의 반대도 불행이 아니다. 네 아버지가 행복했다면 아마도 너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셀마는 엄마의 말을 기억했다.

 

“하지만 불행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네 아버지도, 나도.”

 

셀마는 엄마의 말을 또 기억했다.

 

“네 아버지나 나나 스스로 택한 것이 있다면 뜨거움일 것이다. 살아있는 가슴 말이다. 그 뜨거움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했다.”

 

이틀 후 광주로 돌아온 헬레나는 기다리고 있을 희수 대신 편지지를 발견했다.

 

 

 

네가 가는 그곳이 어딜지라도

 

날개로만 태어난 나는 날아갈 수 있으리.

 

몸은 태어날 때부터 없었으니

 

정신이 드나들 리 없었고

 

정신이 있다한들 온전할 리 없었다.

 

날개로만 태어난 나이기에 날아만 갈뿐

 

버티고 붙이고 살 땅 한 조각 없이

 

내 고향이 바람이려니

 

떠돌다가

 

날개를 펄럭이며 언젠가

 

어깨를 느끼고 어깨의 힘을 알아채고 어깨의 힘이 몸뚱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몸 곁에 네가 있었네.

 

한번 접은 날개는 날 줄을 모르고

 

너를

 

내가 버티고 붙이고 살 땅이라며 감동할 즈음

 

정신이 살아나서

 

 

 


정신이 온전해서

 

다시 나는 미치고 말았다네.

 

미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어서 날개짓으로 그리도 울부짖었음을 알아채고

 

다시 날개를 팔짝거리니

 

내가 버티고 붙이고 살 땅인 네가 사라질 것만 같아

 

이제는

 

날개짓으로 너는 찾는다네.

 

네가 가는 그곳이 어딜지라도

 

날개로 다시 태어난 나는 어디든 날아갈 수 있으리.

 

네가 가는 그곳이 어딜지라도

 

날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던 나는 어디든 네게로 날아갈 수 있으니

 

그곳은

 

내 평생의 날개짓이 멈추게 되는 곳.

 

그곳에선

 

날개짓이 몸짓이 된다.

 

 

 

편지 한 장이 더 있었다. 한 줄뿐이다.

 

 

 

나, 너를 따라 미국에 갈 테야.

 

 

 

기다려도 희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늦은 오후, 충장로로 나가보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학교로 갔다. 안내 받아 간 교무실 희수의 책상 위에 흰 국화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선생님은 엊그제 저녁 충장로에서 오토바이에 치여 돌아가셨습니다.”

 

충장로에 희수가 나타나자 서있던 오토바이에 시동이 걸렸다고 했다. 그리고 희수의 발걸음에 맞춰 따라가다가 희수가,

 

“이 땅에 이런 일이 계속 되고 있다.”

 

외치기 시작할 즈음, 오토바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희수의 등으로 돌진했다고 했다. 오토바이에 받친 희수의 몸이 허공을 마치 날 듯이 여러 차례 회전하다 땅에 떨어졌을 땐 이미 희수의 숨은 멎어있었다고 했다.

 

“고의였어요. 누군가 고희수 선생님의 목숨을 노렸던 것이 분명합니다.”

 

헬레나는 누워있는 희수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헬레나에게 송정역에서 희수가 처음으로 웃어보였다.

 

“돌아오면 나, 많이 달라져있을 거야.”

 

9개월 후 셀마가 미국에서 태어났다. 글.그림=오동명/ 16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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