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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준의 '아버지로 살기, 아버지로 죽기'(4)···처음 나를 인정한 한인섭 선생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칭찬은 모든 존재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근원임을 강조한 말이다. 무게가 6~10톤에 이르고 몸길이가 7~10m에 이르는, 난폭하기로 소문난 백상아리를 사냥하는 바다생태계의 최대의 폭군인 범고래. 그도 조련사의 지속적인 칭찬을 받게 되면 변화하고,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수중 쇼를 한단다. 이처럼 칭찬은 상대를 기쁘게 하고, 그 기쁨은 다시 베타 엔돌핀이나 도파민 등의 호르몬을 분비시켜 모든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한다. 매슬로우(Maslow)도 ‘욕구 5단계설’에서, 인간이 생존과 안전의 문제가 해결된 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칭찬과 인정은 구분되어야 할 것 같다. 칭찬은 즉각적인 반응일 수 있다. 상대방이 빼어난 점, 잘한 것을 추어주거나 높이 평가하는 반응이다. 그런데 요즘 칭찬이 너무 흔하다. 자그마한 일에도 칭찬을 남발하다 보니 칭찬이 난무한다. 그런 경향은 젊은 사람일수록 더하는 것 같다. 물론 칭찬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칭찬을 통해 상대방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다면 최고의 명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칭찬이 난무하다 보면 칭찬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라 입에 발린 말이 되어버리고 지나가는 말이 되어 버린다.
이와는 달리, 인정은 오랜 시간 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자신의 평가를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기에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은근하면서도 묵은 반응이다. 어떤 하나의 장점이나 행동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관찰하고 지켜본 결과를 바탕으로 그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일이다. 칭찬을 즉각적으로 꺼내놓는 패스트푸드라 한다면 인정은 오래도록 묵히고 곰삭은 슬로우 푸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직 성장단계에 있는 어린이나 친밀한 관계의 사람이 아닐 경우는 칭찬이 약일 수 있지만, 어른이나 친숙한 사람에게는 칭찬보다 인정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여자는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고,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인정의 힘이 목숨보다 소중한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여기서 ‘알아준다’는 말이 곧 그 사람을 인정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남을 인정한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기에,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인정의 힘을 알려주신 분이 바로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셨던 한인섭 선생님이시다.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셨고, 그 인정을 통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라 곰삭은 인정을 통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개구쟁이, 말썽꾼에다 천덕꾸러기였다. 쉬는 시간에 교실과 복도 뛰어다니기, 책상 위를 뛰어다니기, 유리창 넘나들기, 여학생들의 고무줄 끊기, 노는 아이들 훼방 놓기 등등을 자행하며 놀부까지는 아닐지라도 악동으로 통했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 눈 밖에 난 건 당연한 일이었고, 밥 삼시 매 삼시로 하루도 안 맞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더군다나 가난이 재산이라 육성회비도 제때 내지 못하는 처지라 선생님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고 심지어는 학교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6학년이 되면서부터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한인섭(韓仁燮) 선생님께서 나를 어여삐 봐주셨던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선생님께서는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나를 너그러운 눈으로 봐주시고, 어여삐 봐주셨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우리 옆집에 사는 여선생님(지금의 사모님)과 연애 중이셨으므로 좋은 이미지를 심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가정방문 오셨을 때 선생님께 때리면서, 엄하게, 가르쳐달라는 어머니의 부탁을 오해하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나를 달리, 어여삐 봐주셨다. 유복자로 태어나 가난과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나를 안타깝게 봤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한인섭 선생님의 관심을 받으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평생 잊지 못할 일이 하나 생겼다.

 

추석이 가까운 어느 날, 수업 중인 우리 교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담임이셨던 선생님이 잠시 복도로 나가셨다가 들어오시더니 나를 바라보시며 “어, 성준이 너 나가 봐!” 하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수업 중에 나가보라니……. 좋은 일은 아닐 게 분명했다. 수업시간에 좋은 일로 나를 부를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며 밖으로 나가자 4학년 담임이셨던 김애숙(金愛淑) 선생님(이름이 분명하지는 않다. 혹시 이름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이 서 계셨다. 또 뭔 일이 터졌구나 싶었다. 쉬는 시간도 아닌 수업 중에 교실로 찾아와 나를 부른다는 건 그만큼 심각한 일이 터졌음을 뜻했다. 그 일은 김애숙 선생님 반 학생과 관련된 문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생각을 아무리 해봐도 그 반 학생과 얽힌 문제가 없었다. 6학년 들어서는, 선생님의 관심에 보답하기 위해 나름대로 착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생각지도 않은 일에 연루되어 매를 맞은 것이 몇 번이며, 기억도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닦달당한 게 또 얼만가. 나는 끌려가는 소처럼 선생님의 뒤를 따라 교무실로 들어섰다.

 

“역시 한 선생님이 제일 대망지다(똘똘하다)고 하더니 다르네……. 다름이 아니라, 이거 우리 집에 좀 갖다 줄래?”

 

선생님은 칭찬과 함께 자신의 책상 옆에 놓아둔 노란 양은 찜통을 가리켰다. 영문을 몰라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내가 퇴근할 때 가져가면 너무 굳어져서 썰기가 힘들거든. 그러니 너가 우리 집에 좀 갖다 주었으면 하고…….”

 

선생님은 나를 달래듯 말했다. 맥이 탁 풀렸다. 혼나고 매 맞을 준비를 하느라 잔뜩 긴장했던 몸이 풀리면서 털썩 주저앉을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애숙 선생님이 사시는 거로(巨老)마을엔 방앗간이 없어서 우리 학교 옆 방앗간에 가래떡을 맡겨 두었단다. 퇴근할 때 가져갈 테니 오후에 뽑아달라고 했는데 순서대로 떡을 뽑다보니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떡이 나오게 됐단다. 떡이 나온 이상 어떻게든 집으로 가져가야 했다. 지금 집으로 가져가지 않으면 떡이 굳어져 썰기가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가져갈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직접 가져갈 수는 없고 해서 부득불 힘이 세고 똘망진 사람을 찾게 됐단다. 당신이 담임을 맡고 있는 4학년 학생을 시켜도 되지만 4학년은 아직 어리고, 길도 잘 모를 거라고 판단하여 한인섭 선생님께 부탁드렸더니 나를 추천하더란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50원과 약도가 그려진 쪽지를 주면서 부탁한다고 했다. 나는 얼른 "예!" 했다. 잘못해서 끌려온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우선 안심이었고, 수업을 빼먹어도 될 뿐만 아니라 버스를 타 볼 절호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시내버스를 별로 타본 일이 없었다. 조천에서 태어나 조천에서 자라고, 조천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 제주시에 나갈 일이 없었고 그러니 시내버스를 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버스 탈 일까지 생겼으니 마당 쓸고 돈 줍는 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지옥이라도 다녀오라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썽꾼에다 천덕꾸러기인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다시 태어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버스를 타고 거로마을 입구에서 내려 약도에 나와 있는 집까지 걸어갔다. 가면서 무거워 몇 번인가를 쉬었지만 힘들거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선생님들이 나를 인정해주시고 나에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겨주신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할 때가 있고, 세상이 나를 알아주기도 하는구나 하는 존재감을 확인하자 힘이 솟았다.

 

선생님 댁은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서 생각보다 찾기 쉬웠고 나는 별 어려움 없이 들고 간 찜통을 건넸다.

 

“아이고, 수고 많았어. 너무 고마워.”

 

김애숙 선생님의 시어머니인 듯한 할머니가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출현에 할머니는 나긋나긋한 말투로, 마치 어른을 대하듯 나의 손을 잡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찜통을 들고 들어가시더니 아직도 따뜻한 가래떡을 두 줄이나 썰어서 설탕까지 곁들인 접시에 내놓았다.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마루로 잡아끌더니 사양 말고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다. 고맙게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고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자 할머니는 다시 내 손에 50원을 쥐어주었다. 선생님께 차비를 받았다고 거절했으나 학용품 사 쓰라고 하면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아버지로 살게 하신 나의 최초의 아버지

 

인사를 마치고 나온 나는 날아갈 것 같았다. 그때껏 살면서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은 것이었다. 말썽꾼도 천덕꾸러기도 아닌 꼭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인정을 처음 받은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눈물까지 삐질삐질 솟아올랐다.

 

학교에 돌아와 잔돈 20원을 선생님께 건네자 선생님께서는 그 돈마저 내게 주시고, 미리 준비해둔 공책이며 연필까지 주시면서 수고 많았다고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셨다. 그 후에도 나는 가끔씩 거로마을을 왕래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이 나를 불러 심부름을 시키시고 용돈에 학용품까지 주셨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쉬는 시간에도 얌전을 떨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나를 알아준 데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고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이란 걸 받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제고사란 이름의 시험을 봤었는데, 일제고사에서 국어 91점을 받아서 상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80점은 고사하고 60~70점에 머물던 나의 성적이 급격히 상승한 것이었다.

 

월요일 아침, 난생 처음 전체조회석상에서 상을 받게 된 나는 세상을 다 얻는 듯했다. 더군다나 일제고사가 어려워 상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내가 상을 받게 된 것이었다. 안 좋은 일로만 이름이 불리던 내가 전체조회석상에서 수상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불리게 된 그날을 나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다.

 

육학년 일반 이성준!

 

예!

 

대답소리와 함께 열에서 빠져나와 앞으로 뛰어나가자 한인섭 선생님과 김애숙 선생님께서 박수를 치고 계셨다. 분명 나를 바라보면서, 나를 위해 박수를 치고 계셨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러나 이를 꽉 깨물었다. 헤픈 웃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처음 상을 받는 게 아니라 예전부터 많이 받아본 사람처럼 행동하기 위해. 아니, 상을 처음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계속 상을 받고 말겠다고 다짐하기 위해.

 

그리고 나는 그 다음부터 일제고사 후에 상을 받는 날이 많아져 갔다. 그리고 졸업식장에서 우등상은 받지 못했지만 진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 모든 변화를 이끈 분은 바로 한인섭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말없이 나를 지켜보시고, 나를 인정해주심으로써 나의 잠재력을 끌어내주신 분이셨다. 입에 발린 칭찬은 아끼셔서 한 번도 하지 않으셨지만 나를 인정하여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줌으로써 나의 존재를 알려주셨고 나의 존재를 알게 해주셨다. 하여 나를 알아주신 최초의 타인은 바로 한인섭 선생님이시고, 내게 남자의 길과 아버지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도 한인섭 선생님이시다. 칭찬보다 더 큰 인정함을 통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고, 나를 세우시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하시고, 아버지로 살게 하신 나의 최초의 아버지시다.

 

그런데 죄송스럽게도 내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는 한인섭 선생님을 잊지는 않고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내게 베풀었던 인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내가 남녕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한인섭 선생님의 장남 한철이 내 제자가 되었을 때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또한 선생님의 정년퇴임 사실도 모른 채 흘려버렸었다. 선생님과 동창이신 전 남녕고등학교 교감 김영원 선생님 퇴임 때 「하간 거 몬 보려불민」이란 시까지 써드리면서도 선생님께는 아무런 보답도 못했다. 죄송할 따름이다.

 

이 글이 선생님께 얼마간 위안으로 작용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이성준은?

 

=제주 출생. 제주대 국어국문학과를 거쳐 단국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작가회의, 단국문인회 회원이다. 제주와 경기도에서 20여년 간 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시인으로도 등단, <억새의 노래>, <못난 아비의 노래>, <나를 위한 연가>, <발길 닿는 곳 거기가 하늘이고 세상이거니> 등의 시집을 펴냈다. 최근엔 창작 본풀이 <설문대할마님, 어떵 옵데가?>와 소설집 <달의 시간을 찾아서>를 내기도 했다. <이청준과 임권택의 황홀한 만남>, <이야기로 풀어가는 우리 시조>, <읽기만 하면 기억되는 고사성어 365>, <글쓰기의 이해와 활용>, <통섭의 자리에 서서> 등 다양한 전문서적을 펴내기도 했다. 1년 전 고향 제주에 돌아와 제주 관련 글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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