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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살다] 왈종미술관 문 여는 이왈종 화백의 '생활 속 중도(中道)' 이야기
한국·세계가 인정한 화가, 서귀포에서 '문화예술 전도사'로 나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어린이를 좋아하는 할아버지 화가. 그래서 누구보다 아름답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화가.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러브콜을 받는 화가.

 

바로 이왈종(68) 화백이다.
 
그의 본명은 이우종. '왈종'은 호인 셈이다. 경기도 화성이 고향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몸이 허약해 외할머니와 함께 화성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잔병치레가 잦았다. 체격도 왜소했다. 몸이 허약해서 어른들로부터 "쓸모 없는 녀석"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야 했다.

 

그는 공부보단 노는 게 더 좋았다. 산과 들을 돌아다녔다. 외할머니와 같이 살아서 눈치라는건 보지 않았다. 형제들은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그는 자유롭게 살았다. 그래서 그림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선생님과의 만남… 그림에 재미를 붙이다

 

집은 가난했다. 그림이 뭔지도 몰랐다. 당시는 "예술하면 깡통찬다"며 예술인을 천대하는 시절이었다. 더구나 한국전쟁 휴전 직후였기 때문에 밥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재미'라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바로 '그림'을 그릴 때였다. 초등학교 시절 이북에서 피난 온 선생님이 그를 아꼈다.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료도 턱없이 부족한 때였다. 밥 먹고 살기도 부족했으니 당연했다. '남산크레파스'라는 것이 전부였다. '남산크레파스'는 초를 녹여 물감을 넣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림이 잘 그려질리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나 미제 구호품을 받을 때였다. 친구들은 구호물품에 크레파스가 나오면 그에게 가져다줬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이후 서울에 있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레 그림과 멀어졌다. 그리고 정말 평범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야 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 즈음 아버지 친구 가운데 '화가'가 직업인 분이 있었다. 친구분 집에서 심부름도 하고 가끔 시간이 나면 그림도 그렸다. 말마따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그게 그에겐 기회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어렵게 서라벌예술대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추상화가 유행이었다. 배우고 싶었지만 미술과 관련된 원서도 없고, 미술이론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실기에 집중했다.

 

그래도 그는 변관식, 안상철 교수와 같은 훌륭한 스승 밑에서 추상화를 배웠다. 그러나 점점 한계를 느꼈다. 작가로 등용하기 위한 유일한 관문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매번 고배를 마셔야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장관상, 대통령상을 받아냈다. '진짜 내가 그림에 소질이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그때 당시엔 4호 크기 작품 한 점을 그려주면(모사)  등록금이 마련됐다. 또 그림을 그리는 대학생이라는 소리에 한 표구사에서 선선히 종이도 대줬다. 종이 값도 만만치 않던 시절, 그렇게 종이 걱정 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모사를 하며 그림연습을 했다. 인물도 그렸다. 모사를 하면서 드는 자괴감은 사치였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취방을 마련할 돈도 없어 종로구 연희동에 있는 조그마한 공동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그래도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 없었다. 미대 진학을 준비중인 입시생을 가르쳤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
 
오로지 한 길만 걸었다. 어렵게 졸업을 했다. 화실을 마련해 본격적으로 입시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돈을 좀 모았다. 입시생 가르치는 것을 내팽개쳤다.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작업실을 마련했다.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는 작업만 했다.

 

젊은 시절 그의 관심은 '사람'과 '고독'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람’과 ‘고독’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주로 찾은 장소는 남대문 시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회현아파트 인근에 앉아 고된 노동에 지친 지게꾼이 독한 소주를 마시는 모습을 그렸다. 김현승 시인의 '절대고독'이라는 시를 읽고 그림으로 형상화 시켰다.
 
1968년 제주도를 만났다. 대학시절 졸업여행을 통해 만난 제주도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눈에 비친 바다, 산, 나무 등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곳도 그때 처음 발길을 내디뎠던 곳이다. 정방폭포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눈쌓인 동백꽃, 초가집은 그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 충분했다
 
민주화의 바람이 불던 1980년대. 그는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시위의 일상다반사, 학교 곳곳에 걸개그림들이 걸려 있어 어수선한 시기였다. 졸업여행 당시 찾았던 제주에서의 기억이 마음 한켠에서 점점 커졌다. 1990년, 교수로 재직하던 추계예술대에 안식년을 신청했다. 제주로 향했다. 작업에 올인했다. 뭍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교수’를 버리고 제주라니. 아내가 반대했다. 당연했다. 그러나 아내도 이윽고 마음을 돌렸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딸과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나자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로 오고난 뒤 그의 작업속도에 탄력이 붙었다.  평생 수십여차례의 전시회를 했지만 제주생활을 그린 작품 전시회가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개인전도 20차례 이상 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프랑스, 방글라데시, 뉴욕, 독일, 말레이시아, 홍콩, 중국 등에서 열린 전시회에 초청받기도 했다. 1997년에는 '아트뉴스', 플래쉬 아트'와 더불어 세계 3대 미술전문잡지로 꼽히는 보자르(Beaux Arts)가 그를 대표적 한국화가로 꼽기도 했다. 보자르는 당시 이왈종, 이종상, 박대성, 황창배, 김병종 화백의 그림을 모아 특별호로 발간했다.

 

 

제주로 온 그는 골프를 즐겼다. 골프를 즐기며 건강을 관리했다. 골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즈음부터 그림에 골프장, 골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손에서 골프채를 놓았다. 그리고 외부와의 관계를 끊었다. 칩거에 돌입했다. 화가는 작품에 몰입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그런 그가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지난해 봄부터 지난 1990년 정방폭포 인근에 마련한 살림집 터에 3층 규모의 미술관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공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왈종미술관, 서귀포에 문화예술 뿌리내릴 전초기지

 

미술관 이름은 그의 호를 딴 '왈종미술관'이다.  992㎡규모에 부드러운 백자 찻잔 형태의 벽돌집이다. 미술관은 외벽에 흰색 시멘트를 칠했다. 부속건물인 아트숍 겸 커피숍은 검은색으로 칠했다. 오는 31일 개관을 앞두고 있다.

 

그는 백자 찻잔처럼 건물 모형을 흙으로 빚어 건축가에게 보여줬다. 1층 바닥에 글도 직접쓰고 색도 칠했다. 건물로 들어서는 입구엔 영국 조각가 앤서니 곰리의 강철 소재 자소상(자신을 모델로 한 조각)이 서 있다. 제주돌로 깎은 이왈종 자소상은 옥상 꼭대기에서 서귀포 앞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다.

 

 

미술관 1층 바닥엔 '일체유심조 심외무법(모든게 마음에 달려있고 마음이 곧 법이다)'이란 생활신조를 새겨넣었다. 1층엔 어린이미술관(교육실), 도예실, 수장고를 갖췄다. 2층엔 전시실 중심이다. 3층엔 작업실이다. 현재 그는 개관기념전으로 '다문화가정 돕기 판화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제주에서 아내 김예순(60)씨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슬하에 두 자녀를 두고 있지만 큰딸 이오성(33)씨는 현재 서울의 한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둘째 아들 이규선(32)씨는 결혼 후 영국에서 살고 있다.

 

 
-50년 가까이 그림을 그려오고 있다. 그림에 대한 철학은 무엇인가?
"'중도(中道)'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 중도(中道)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훈련이다. 예를 들어 중간에서 멀어져 양극으로 가까워 질 수록 내 마음이 괴롭다. 집착하다 보면 다치게 된다. 그래서 집착하지 않는다. 중도를 주제로 작품활동을 한지 20년이 넘는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고민하는 것이다. 꽃을 중심으로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 작은 풀을 집보다 더 크게 그리는 것, 사람을 의식적으로 작게 표현하는 것 등은 절대평등이다. 생명의 선상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소중하다. 이는 중도(中道)와 맞닿는다. 평등의 시각인 것이다."
 

 

-제주에 살아보니 어떤가?
"좋다. 너무 좋다. 제주는 자기 주관을 갖고 살 수 있다. 그래서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오후 5시 이후로 한다. 지금 하고 있는 미술관 공사가 마무리 되면 더 작품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제주는 경치도 빼어나서 좋지만, 주로 작은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에 행복함을 느낀다. 작은 풀과 꽃을 보면 행복하다."

 

-제주는 어떤 지역인가? 한마디 해달라.
"(제주4.3사건 등) 과거의 아픔을 붙들고 있으면 안된다. 항상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더 소중하다. 과거에 집착하고 발목 잡혀 있으면 더 상처를 받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아픔이 너무 많다. 집착하기 보단 어떻게 미래를 설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또 제주지역사회에 전문가가 나와야 한다. 서울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전문가가 있으면 제주가 발전할 것이다. 특히 서귀포만이라도 돌담을 보존해야 한다. 이런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쉬운것부터 해나가야 한다."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중도를 주제로 한 작품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 이와 함께 미술관 앞에 '우영팟'(텃밭)을 만들고 있다. 제주도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다. 한 3년정도 걸릴 것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지난 10년 전부터 미술교육 봉사활동을 해왔다. 이를 이어갈 계획이다. 그래서 미술관 1층에도 어린이 미술관을 만들었다. 이 곳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무료강의를 할 예정이다. 어린이들을 보고 있으면 즐겁지 않나? 그 상상력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어린이들에게 배우는게 많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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