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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 연재후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 "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쑥스럽고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고향 제주도청에서 행정사무관 공무원으로, 즉 공인의 삶을 시작하고 고향의 도지사로 이를 마무리했던 나로서는 제주 땅과 역사를 인질로 삼아 그 뒤에 숨어서라도 내 삶의 이야기로 인한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한번 고위공직을 담당했던 사람은 퇴임 후에도 공인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동안 나의 공직여정에 그리고 공직 이후의 삶에 이 말이 얼마나 녹아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가야할 공직의 길을 항진할 수 있도록 행운과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 삶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뜻밖에도 횡재하는 나 스스로를 만난다.

 

여섯 달 공부하고 합격한 행정고시 시험장에서도, 어승생 저수지에서도, 신제주 개발계획에서도, 중문관광단지 개발계획에서도, 그린벨트 지정에서도, 한라산 국립공원 지정에서도, 강정천 용수개발사업에서도, 미국 유학생활에서도, 로마 식량농업기구(FAO)에서도, 한·미 쇠고기협상 테이블에서도, 마사회 사건에서도, 삼다수 공사 현장에서도, 컨벤션센터 도민주 공모 현장에서도, 관광복권 매장에서도, 제주도 환경용량평가와 중산간지역 지리정보시스템(GIS)에서도, 도쿄 노무라증권 본사 회의실에서도, 섬문화축제 현장에서도, 농·축협 통합반대운동과 국회 농수산위원회 법안소위보고 현장에서도, 은혜재단 평화양로원에서도, 주식회사 ‘삼무’와 힐랜드에서도, 서울구치소와 영등포교도소 독거방에서도, 2010년 도지사 선거운동 현장에서도 나는 언제나 내 삶에 들어와 나를 공인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 행운과 기회를 만난다.

 

그 행운과 기회는 제주도와 하나님이었다.

 

막상 큰 아이 용인이가 태어나자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먹여 살리기에 다급해진 나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을 찾아 “중앙부처 발령은 1년 정도 기다려야한다. 그러나 지방을 원하면 서울이든 제주도든 당장이라도 발령 내 줄 수 있다”는 내무부 인사담당자의 말에 행정고시 합격 한 달 만에 운명의 제주도청을 선택했다.

 

도지사 꿈 같은 것은 애당초 내게 없었다. 가장으로서 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향에서 공직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기획계장, 기획관, 지역계획과장 그리고 청와대 ‘제주도관광종합개발기획단’ 파견근무 등을 거치면서 정책과 시책사업을 통하여 나는 제주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회가 학습과 경험을 통하여 나를 ‘제주통’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이 나를 제주도와 묶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신제주개발계획, 중문관광단지개발계획, 어승생용수개발사업, 강정천용수개발사업, 도시개발제한구역(Green Belt) 지정, 한라산국립공원 지정 등이 그 당시 내가 담당과장으로서 기획, 추진했던 굵직한 일들이다.

 

그 후 농림부 축산국장, 농업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 주이태리 한국대사관 농무관 겸 FAO(국제식량농업기구) 교체수석대표, 미국 조지 타운(George Town) 대학 객원 연구원 등 경력은 모두 제주도와 운명 지워진 내게 필요한 훈련이자 준비의 기회였다.

 

제주도가 내게는 행운이자 기회였다.

 

1974년 6년간 근무하던 제주도청을 떠나 농림부로 옮겼던 나는 그 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립대학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공부하는 동안 아내에 대한 생각은 매일 쓰는 편지로 참을 수 있었는데 김치 먹고 싶은 생각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그 곳에 한국인이라고는 후일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김경동 사회학 교수와 유학생 서너명이 고작이었다. 교포가 없으니 김치가 있을 턱이 없었다.

 

배추를 구할 수 없어 대신 양배추를 사서 소금에 절이고 고춧가루로 비벼보지만 그것은 내가 찾는 김치와는 족보가 달랐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에 한인교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그 교회를 찾아 나섰다.

 

 

 

 

과연 그 곳에 김치가 있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나에게는 예배나 교회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예배 후 제공되는 점심메뉴의 김치만 보였던 것이다.

 

그 후 일요일만 되면 김치를 맛 볼 요량으로 그 교회를 찾았다. 그러던 어 느 날 나는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내 삶 속에 들어와 계신 것을 알았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사회 사건으로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강제 주거이전을 당했을 때는 하루 세 갑씩 피우던 담배를 기도 한방으로 날려버리기도 했다.

 

기독교와 정치에 관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하나님의 정치’를 썼던 짐 윌리스(Jim Wallis)는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지만 그것은 사적인 만남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의 정치는 ‘공익’개념이 그 요체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장 8절)?”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내 정치적 삶이 사익과 공익 사이에서 공익 쪽으로 기울어지는 하나님의 추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는 제주도에 이어 행운이자 기회였다.

 

나는 지난 날 도지사 선거에서 한번 당선되고 두 번 낙선했다.

 

선거과정에서 나를 지지하고 협력했던 모든 분들에게 지금도 나는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기회를 만들어 그분들의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 삶의 이야기에 담고 싶었다.

 

다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리더십은 진정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없다”는 카네스 로드(Carness Lord)의 말로 스스로를 변명해온 나에 대한 용서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자기가 극복할 수 없는 단점도 자기가 지닌 장점처럼 자신의 일부로 여겼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도지사 선거에서의 당선과 낙선도 이제는 모두 나의 소중한 자산이자 내 자신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당선과 더불어 낙선도 있었기에 나는 독선의 해악을 알게 되고 비전과 가치 공유의 미덕을 학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라리 첫 선거에서 낙선한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하는 반성과 회한을 내 삶의 성숙을 위한 자양분으로 비축할 수 있었다.

 

낙선의 기회가 내게 없었더라면 이러한 미덕의 학습과 자양분 비축이 과연 가능했을 것인가?

 

낙선이 내게 준 미덕의 학습과 자양분 비축 없이 올바른 공익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인가?  그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소명을 인지하는 일이 가능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공인의 삶을 살아온 내 삶의 동반자이자 가족으로서 그 숱한 고통, 분노와 절망을 이겨내며 나를 지켜주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내게 분에 넘치는 가족이다.

 

아내는 그 고통 가운데서도 방송통신대학, 이화여대 대학원, 제주대학교 박사과정을 거쳐 지난 2007년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래 제주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아내는 언제나 내게 말한다. “무엇을 하든지 살아만 계시면 좋아요.” 아내는 내 기고만장의 발원지다.

 

큰아이 용인이는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판사와 변호사를 거쳐 현재는 제주대학교 법률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다.

 

둘째 아이 용규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그 후 미국 와튼 스쿨(Waton School)에서 MBA를 취득하고 현재 세계적인 사모펀드 블랙스톤(the BLACK STONE)의 한국대표로 있다.

 

셋째 아이 용준이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텍사스(Texas) 공대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미국 코네티컷(Connecticut)주립대학 의공학(Bio Medical Engineering) 교수로 있다.

 

기개를 갖고 잘 자라주는 아이들이 있어 너무도 고맙다. 아들들은 내 삶의 에너지원이다.

 

내 삶의 이야기를 실어준 제이누리(jnuri) 가족과 양성철 대표, 그리고 내 글을 끝까지 읽으며 격려, 충고와 지적을 아끼지 않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 분들이 없었더라면 내 삶의 이야기는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 신구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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