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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49)

2011년 1월29일 영등포교도소 문이 열렸다. 높다란 담장을 뒤로 하고 문을 나서자 고마운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김성흡 전 도의회 사무처장을 비롯해 정말 많은 이들이 와줬다. 눈물겨웠다. 그들과 손을 맞잡고 곧바로 난 서울의 둘째(신용규) 집으로 갔다. 이틀을 둘째아들 집에서 머무르고 1월31일 제주로 왔다. 하지만 사실 주변과는 연락을 끊었다. 몸도 마음도 세상에 나갈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전히 ‘부재중’이었다.

두문불출하다 설을 사흘 앞둔 2월10일 아내와 난 한적한 어느 중소도시로 무작정 떠났다. 아내와 한 며칠 쉬다 올 요량이었다. 그 도시에서 이틀간 머물며 설날인 13일은 마침 일요일이라 한 교회를 찾아 아내와 주일예배도 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눈여겨 두었던 스테이크 하우스 'OUT BACK'이란 곳에서 아내와 함께 점심을 했다. 그 때였다. 우리 부부가 한창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어떤 분이 우리 식대를 내고 가더라는 것이다. 우릴 알아볼 이도 없는 곳인데 의아했다. 물어보니 그 지역에서 복지사업을 하던 단골 40대란 것이 고작인 정보였다. 다만 그는 그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모르는 분들이지만 노부부의 식사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저 식사비를 내고 싶었을 뿐이니 결례가 아니길 바란다.” ‘얼굴 없는 천사’를 만난 기분이었다. 정초부터 우리의 마음은 푸근했다.

 

 

설 연휴를 그렇게 보내고 집에 머물고 있는데 주변이 성화였다. 출소를 환영하는 ‘신구범의 사람들’(?)의 신년인사회가 있으니 반드시 나오라는 소리가 높았다. 머쓱했지만 2월18일 제주시 늘봄가든 현장으로 갔다. 300여명 가까운 이들이 몰려 내 스스로도 놀랐다. 그런 말을 했다. “어차피 살아가는 게 곧 정치더라. 정치하는 이는 줘야 하는데 그저 난 받기만 했다. 영치금·책은 물론 여러분의 면회를 오는 수고까지 곁들여 그저 사랑을 받기만 했다. 정말 덕택에 건강하게 살고 돌아왔다. 고맙다.” 그렇게 덕담을 주고받는 순간이었다. 불쑥 김태환 현직 지사가 우리 자리로 찾아왔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사실 나로선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공직으로 바쁜 그였지만 그는 수감된 나를 3번이나 찾아왔다. 그에게 환영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그의 건배사 화답은 걸작이었다. “우리는 하나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그 자리엔 언론계 기자도 많았고, 그해 치러지는 지방선거를 앞둔 터인지라 그 발언으로 마치 ‘선거를 앞둔 신구범-김태환 동맹관계’로 비쳐질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모든 걸 멀리하고 그냥 쉬고 싶었다. 물론 가석방 신분으로 나온 터라 형기가 만료되는 5월25일까진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신분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마음도 추스르고 얼굴이나 뵙자”고 연락이 오는 이들은 다 정치권 인사들이었다. 자연스레 그들과 만나 지방선거 애기를 나누고,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제주의 현주소를 짚어보게 됐다. 김태환 지사는 이후에도 식사자리를 같이 했고, 제주대의 강지용 교수,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 사장, 김한욱 전 부지사, 고계추 전 제주개발공사 사장은 물론 강창일·김우남 국회의원 등이 고맙게도 식사자리에 나를 불러줬다. 하지만 화두는 결국 선거였다.

 

답답했다. 듣고 또 들어도 답답한 소리뿐이었다. 제주땅에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보잔 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그런 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과거의 구태와 굴레에 갇힌 소리만 요란했다. 그 시절 주변에 건넨 얘기다. “지금으로선 내가 할 일이 없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서라도 꿈을 가진 사람들이 제주사회에서 길잡이가 됐으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은 과연 없나?” 의문이자 고민이었다. 사람들은 ‘정의롭고 공익이 중심이 되는 지방정치’를 말하지만 말에 불과했다. 실제 행동하는 이도 없고 역할을 해주는 원로도 없었다. 그때 결심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원로는 원로가 아니다. 말해야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원로가 아무 말 못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뇌고 있는데 일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제주선거판의 그렇듯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제주의 정치지형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3년 전인 2010년 3월9일 고희범 도지사 예비후보는 무기한 단식을 시작했다. 오랜 구원(舊怨)이었던 나의 정치적 라이벌이 민주당 복당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며칠 뒤인 16일 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성희롱 전력을 이유로 그에게 ‘후보 적격 불인정’이란 표현으로 복당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틀 뒤인 18일엔 2006년 선거에서 분루를 삼킨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 돌연 출마를 선언했다. 급박히 움직이는 시계추였다.

 

 

그 와중에 이유근 전 한마음병원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나와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친구 사이다. 고교동창으로서 그는 내가 느끼는 이상으로 날 생각하고 도와주는 유일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다. 나에 대한 공적인 염려나 기대가 특별해 내가 한편으론 놀라면서도 고마워하는 친구다. 그는 대뜸 “현 후보가 출마한다고 하는데 함께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도를 알았고, 속으로도 그리 내키지 않는 편이라 우선 이 원장과만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는 “어쨌든 이번에 새로운 사람이 지사가 돼야 한다. 나로선 현명관 후보를 돕고 싶다.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 “이번 선거의 핵은 구태를 일삼은 해악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제주사회를 위한 길이다. 누가 지사가 되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난 고희범 후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실 2006년에도 난 지방선거를 앞두고 현명관 전 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시절 현 후보의 상대는 김태환 현직 지사다. 이유근 원장이 마침 현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면 현 후보를 도와야 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난 현 후보에게 마뜩치 않은 편이었다. 지사 재임시절 컨벤션센터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삼성그룹 이건회 회장 비서실장이던 그를 찾아갔지만 그는 약속된 사무실에 없었고, 피트니스센터에서 반바지 운동복 차림으로 나를 맞았다. 제주도민의 대표자에 대한 그의 인식수준을 느끼고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2006년 선거를 앞둔 어느 날 난 이 원장에게 “그를 만나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하고 현 후보를 제주시 칼호텔 19층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난 당부 겸 질문을 세 가지 했다. 그 하난 “당신이 지사로 봉직하고 싶으면 선거운동하지 말고 제주도 공부부터 했으면 좋겠다”였다. 둘째부터는 질문이다. “지사직에 당선되든 낙선되든 제주도에 남아서 살겠는가?” 그리고 “난 돈이 없으니 지사직을 그만두고 농사짓는다. 하지만 당신은 돈이 있다. 당신이 가진 걸 갖고 제주사회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그 두 가지 질문이었다. “대답해주면 내가 당신을 돕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했다. “그러면 난 당신을 도울 수 없다.” 그렇게 끝을 맺었고, 사실 2006년엔 그의 상대방인 김태환 지사를 도왔다.

 

 

2006년 김 지사를 도운 이유는 ‘제주의 자존’ 때문이다. 그때 현 후보는 중앙에서 전략공천 형식으로 내려왔다. 현직 지사의 지지율이 50%를 웃도는 상황이었는데, 자당 소속 현직 지사가 있는데도 ‘위에서 찍어 누르듯’ 다른 후보를 내세운 것이다. 제주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건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봤다. 그렇게 난 김 지사를 도왔고, 결국 김 지사는 승리했다. 그런데 그런 4년 전의 과거가 있는데도 현 후보는 2010년의 또 다른 만남에서 나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이 원장은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는 이유로 거들었다. “도울 수 없다. 난 고희범을 돕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 인사들이 당신을 돕는 건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고 자리를 끝냈다.

 

내키지 않았다. 우근민-신구범-김태환으로 이어지는 42년생 그룹의 격정을 털고, 이제는 바꿀 때도 됐다고 생각했지만 현명관 후보의 등장으로 세대교체가 물 건너가는 상황으로 치달아 더 내키지 않았다. 도대체 제주사회에서 세대교체가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곱씹어 봤다. 사실 제주에서 그동안 제기돼 온 세대교체론은 허상이다. 실체가 없다. 더 정확하게는 주체가 없다. 지도자는 스스로 서는 것이다.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 그랬다. 그 때는 “고희범이란 새 얼굴이 나왔는데 제주정서에 휘둘리면, 그마저 아웃되면 제주엔 과연 희망이 있는가”란 번민에 휩싸였다.

 

그 때 내 비망록 표현은 이렇다. “원칙과 진실이 언제나 변칙과 거짓에 밀리는 꼴이다. 그리 되면 옳고 그름의 분별력을 삼켜버린다.” 몰상식이 상식을 압도하는 사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얘기를 기억하는가? 사실은 지동설이 맞는데 천동설로 억누르는 사회를 기억하는가? 1%의 가능성만을 갖고서도 진실로 도전하는 사람, 도전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죽은 사회란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제주엔 이 1%를 추구하는 사람이 이리도 없단 말인가”란 한탄이 그 시절 나를 지배했다. 사실 1%로는 둑을 지키기 어렵다. 하지만 그 1%가 둑을 무너뜨릴 순 있다. 지금도 한스럽고, 안타까운 우리 제주다.

 

4·3추념일을 앞둔 4월2일이다. 뭍에서 노조단체들도 추모행사 방문차 제주에 왔다. 물론 축협노조 이영초 위원장 등 일행도 제주로 왔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들은 오래 전 떠난 축협중앙회장을 잊지 않고 불러줬다. 그 자리에 난 고희범 후보를 초청했다. 그들에게 4·3얘기를 진지하게 풀어내던 고 후보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에게 “정책으로 승부하라”고 조언했다. 내 마음은 그 때까지도 고 후보를 위한 것 뿐이었다.

 

4·3얘기가 나온 김에 할 말이 있다. 2010년 4·3위령제엔 대통령도, 총리도 오지 않았다. 천안함 사건 후 구조작전에 나섰다 숨진 고 한 준위의 영결식이 겹쳐서도 그랬겠지만 제주에선 말이 많았다. 홀대론이 불거졌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총리나 대통령에게 뭘 기대하고 있는가? 그들이 오지 않았다고 우리가 뭘 잃었는가? 제주에 ‘장두정신’이란 말이 있다. 기대하는 것도, 잃을 것도 없는 것이다. 결국 자존의 문제다. 4·3을 우리 손으로 당당하고 의연하게 기리고 지켜가면 될 것을 왜 저 먼 북녘만 쳐다보며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청만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대통령이든 총리든 누구든 가슴은 떼어놓고 몸만 오는 자들인데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매달리고 기다려야 하는지 난 의문이다. 그나마 고 노무현 전 대통령만이 현직 대통령 시절 가슴을 부여잡고 이 섬 제주에 왔던 걸로 기억한다.

 

정부 관료의 대표는 사실 누가 오든 ‘가슴’은 없다. 그런데 제주도민은 거기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의 역사도, 시간도 다 우리 것이다. 우리가 주인인데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우리가 떼를 쓰는 꼴이다. 그 시절 내 메모는 “제주야! 힘 빌리는 일 이제 그만해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4월27일 한나라당 도지사 후보 경선에서 현명관 후보가 승리했다.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이제 됐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난 이전과 똑같은 얘기를 했다. “난 고 후보와 약속했다. 도울 일 없다.” 그러나 그 결심은 며칠가지 않았다. 내 입장을 무너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5월6일 현 후보가 이유근 원장을 대동, 나를 또 만난 자리에서도 난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5월10일 현 후보의 동생이 일을 저질렀다. 금품살포 사건이 터진 것이다. 상대 후보에게 더블 스코어로 앞서가던 여론조사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현 후보는 40%대에서 20%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내 고민이 깊어졌다. 과거 구태·해악세력이 집권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현실화되고 있었다. 5월11일은 내가 고희범 후보의 선거캠프를 찾아 본격 협력을 약속하는 날이었다. 고 후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돌발상황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기다려달라.” 고 후보를 찾아가는 건 그렇게 유보할 수 밖에 없었다.

 

5월13일 오전 7시 이 원장과 현 후보, 그리고 나는 또다시 마주 앉았다. 현 후보는 당에서 공천을 취소, 이미 한나라당 도지사 후보가 아니었다. 그는 “만약 출마를 포기하게 되면 고 후보를 돕겠다. 하지만 현재로선 출마가 원칙이다”고 말했다. “출마 여부를 결정 못했다”던 그는 그날 오후 1시20분 “출마한다”고 나에게 알려왔다. 그때 선거판에서의 내 운명이 결정지어졌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고 후보를 집으로 불렀다. “구악 세력 당선의 우려가 현실화됐다. 난 그걸 막아야 한다. 이해해 달라.” 그로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가 막힌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선 하는 수가 없었다.

 

5월14일부터 현 후보의 정책과 기획을 거들었고, 내 형기만료일인 5월25일부터는 두 팔을 걷고 현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었다. 한나라당 공천에 반발, 뛰쳐나온 무소속 강상주 후보와의 단일화 논의도 현 후보의 부탁에 못 이겨 내가 성사시켰다. 5월27일엔 본격 유세지원은 물론 상대 유력후보의 사퇴요구 기자회견도 했다. 회견 자리에서 기자의 질문에 되받아 했던 말이 기억난다. 기자들이 “누가 지사가 되길 원하는가”라고 물었다. 난 “고희범 후보가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현명관 후보를 지원한다. 그는 수단이다.” 그 말이 전해져 현 후보에게는 많이 언짢은 일이었겠지만 솔직히 내 본심은 그랬다.

 

2010년 6·2선거를 앞둔 5월31일 오전 11시30분엔 폭로기자회견에도 나섰다. 그동안 회고록에서 거론한 3차례의 선거에서 불거진 논란의 진실이다. 그러나 그 때 언론은 싸늘했다. ‘태산명동 서일필’이었다. 어마어마한 사건들이었지만 과거를 망각하는 사회였다. 특정 후보 측의 정치적 주장으로만 치부했다. 진실엔 관심 없고 그저 편싸움만 쳐다보는 격이었다. 선거결과 내가 도운 후보는 결국 패배했다. 제주·서귀포시 동 지역에서 근소한 차로 이기고, 내 고향인 조천읍에서 선전했지만 대부분의 읍·면지역에서 그는 졌고, 상대후보의 고향인 구좌읍에선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래도 박빙의 승부여서 2252표 차였지만 어쨌든 현 후보는 졌다.

 

그가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주가를 올릴 때 캠프사무실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지만 그가 주저앉을 무렵은 물론 선거결과가 나오자 사람들은 썰물이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허탈했다. 선거결과가 나온 다음날인 6월3일 새벽 4시 난 터덜터덜 걸음으로 집으로 갔다. 가면서 강상주 후보의 장삿술에 혀를 내둘렀다. 투표용지에 이름을 남기는 지연 단일화로 그는 현 후보에게 단일화 합의 선심을, 당선된 후보에겐 표 잠식(?)이란 선심을 쓴 결과가 됐기 때문이다. 그가 의도하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시절 무효표는 통상의 2000표를 넘어 8800표나 됐다.

 

6월3일 저녁 선거패배를 인정하고 현명관 후보와 선대위원장이 배석한 만찬자리가 있었다. 난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약을 받았다. 그를 돕기 전 그는 나에게 “일본의 마츠시다 정경숙 같은 정치학교를 만들고, 당락을 떠나 ‘현명관 펀드’를 만들어 제주의 인재를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그걸 재차 물었고, 그는 재확인했다. 난 그에게 “선거패자는 물러서고 말았는데 졌지만 제주를 위해 좋은 일하는 선례가 되겠다”며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그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선거는 끝났지만 묵과할 수 없는 일은 그 선거에서도 많았다. 상대방의 많은 허위사실 공표 중에서도 우린 6건의 허위사실 공표건을 주목했다. 허위사실 공표 6건 중 4건이 나의 도지사 재임시 시책사업이거나 나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내 스스로 직접 고발을 제기할 생각은 물론 낙선한 다른 후보 측 선대위원장들과도 연대, 고발을 제기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며칠 뒤 상황을 보니 현 후보 역시 따로 고소고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희생할 마음을 먹었다. 사람이 용서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용납해선 안될 게 있다. 추악한 공작정치와 거짓말 정치를 우리 사회가 용납해선 안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고쳐진다면 난 거뜬히 나설 마음이었다. 사실 나 역시도 고향 제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내가 제주를 사랑하는 한 체면 따위나 생각하며 눈을 감을 순 없었다. 긴 제주역사를 생각하면 잠시의 지적과 비판에 아랑곳할 생각이 아니었다.

 

낙선 후보 측 선대위원장의 공동기자회견을 생각하며 고심 중이던 고희범 후보를 만나 얘기를 나누던 자리에서 현 후보의 전화를 받았다. 6월16일 제주시 라마다프라자 호텔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삼성 측 변호사들의 검토의견과 이를 종합정리한 또다른 변호사의 의견을 들어 “당선자의 허위사실 공표가 명백, 아웃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없다는 말을 에둘러 전했다. “재선거를 하게 되면 자신의 이미지 관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그는 빙빙 돌려 말하는 것 같았다. 제주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놈 싼 불에 깅이 잡는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힐 순 없지만 열매는 따 먹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속이 끓었지만 “오케이 내가 한다”고 나섰다. 그의 속셈은 대신 고발에 나서달라는 것이었고, 내 주변에서도 선거결과에 분통을 터뜨리는 이가 많아 나 역시 그저 침묵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금 하는 얘기지만 현 후보는 고발 후 발생한 변호사 비용 등 법률비용을 상당부분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껏 10원 한푼도 받은 바 없다. 기가 막힌다.

 

 

난 그해 7월20일 도의회 도민의 방 기자회견을 통해 당선자를 고발한다고 밝혔다. “너무 많은 거짓말로 도민을 우롱한, 처벌받지 않은 범죄자”라고 당선자를 지목했다. 당선자 인수위가 내 둘째 아들의 뒷조사까지 하는 것도 밝혔다. 허위사실 공표 건은 관광복권이 자신의 작품이란 것을 비롯해 컨벤션센터 규모축소 문제, 삼다수 민영화 주장, 성추행 사건의 문제 등 당선자의 거짓말 사례는 수두룩하다.

 

검·경찰은 당선자를 소환조사하는 등 한동안 법석을 떨었다. 10월13일엔 전직 지사 모임인 곰솔회 등 주변의 압박에 못 이겨 재차 기자회견을 했다. 화해를 요구하는 주변의 목소리에 다시 불려나간 것이다. 난 그렇게 말했다. “그가 지금이라도 잘못을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도민에게 사과하면 고발을 취하하겠다. 사법적 판단과 관계 없이 사과하지 않으면 내가 그와 화해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꺼림칙 했지만 그게 맞았는지 검찰은 그에게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사유는 증거불충분이었다. 그렇다면 고발한 난 무고죄가 돼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 역시 지금 하는 얘기다. H변호사가 들려준 말이다. 당선자는 험악한 상황에 내몰렸고, 사법처리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그와 오랜 인연을 가진 장군출신인 K씨의 대활약(?)으로 그는 회생했다는 것이다. 그의 능력에 언제나 난 탄복한다. 놀라울 뿐이다.

 

난 그해 8·15 사면으로 특별복권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가석방 후 형기가 만료됐지만 사면복권이 이뤄지지 않으면 5년간 정치활동의 제한을 받는 신세가 될 뻔했다. 물론 지금 어떤 정치적 행보를 걷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연금 상태가 된다는 건 나로선 힘든 일이다. 아무런 말도 못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말한다. 제주 지방정치의 대명사가 돼버린 ‘신·우 갈등’이란 말은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 그런 프레임으로 사람을 가두는 건 과연 옳은 것인가? 나는 어떠한 행동이나 의사표시를 해서는 안되는가? 그런 표현의 결과는 나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도민들의 입에서 ‘신우갈등’이란 말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난 침묵하란 소리가 된다. 그럴 수 없다. 의도는 아닐 지라도 그런 용어는 나를 정치적 고립과 연금으로 몰아가는 말이다. 오히려 힘을 가진 승자가 약자와 패자를 재갈 물리는 걸 용인하는 것이다. 난 그 틀에 잠길 수 없다.

 

상식과 정의의 길이라면 언제나 난 움직일 생각이다.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을 지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말로 마무리한다. "진실을 덮어둔 화해는 오래 가지 못한다." 28년 간 옥살이를 한 그는 그렇게 갈등을 진실로 풀었다. <50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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