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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38)

검찰과 모진 인연을 쌓은 탓인가? 숱한 혐의의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지사 당선자와 함께 경쟁후보였던 나 역시 사전선거운동 혐의와 더불어 성추행 운운 발언에 무고란 혐의가 덧씌워져 재판정에 서게 됐다. 검찰에 의해 기소가 된 것이다. 두 건의 혐의 모두 인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불법과 왜곡, 허위사실이 판친 2002년의 선거문화를 바로 잡고자 나 역시 재판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했다. 내 시시비비를 가리다 보면 상대의 불법과 공작이 자연스레 드러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 변호인의 조언과 검사의 간곡한 호소에 못이겨 피의자 진술조서에 서명을 해주었지만 그건 내가 비록 오명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불법선거를 발본색원하려는 의지였다.

 

대선이 코앞에 닥친 시기였다. 재판에 임하는 것과 별개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약속했던 선거지원 활동에 나서야 했다. 2002년 12월1일 제주를 떠나 경북 고령·성주를 돌기 시작했다. 축산인들을 규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 12월6일엔 이 후보의 제주유세 일정에 맞춰 그를 도왔다. 그러다 보니 그날 저녁 자연스레 이 후보와 저녁식사를 겸한 회동을 갖게 됐다. 그 자리에서 난 그에게 3가지를 건의했다. 첫째는 “이 후보의 답변이 너무 정돈돼 멋대가리가 없다. 유권자가 동류의식을 못 느낀다”는 푸념이었다. 둘째는 “노동문제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 등 중요현안에 대해선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민투표로 결정하는 방안을 모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마지막으로 그에게 신신당부한 것이 “전국의 음성나환자 정착촌 중 한군데를 이 후보가 꼭 방문해달라”는 것이었다. 농림부 축산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곳 축산인들과 맺은 애틋한 인연을 떠올렸고, 당선될 것으로 본 이 후보가 그 현실을 잘 이해하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그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할 수 있기 위한 정서적 유대를 구축하려던 내 복안이었다.

 

 

물론 난 제주유세 직후 대전·충남·경북 등지를 돌아 12월9일 서울로 간 뒤 곧바로 충남 서산과 논산으로 달려갔다. 음성나환자 정착촌 출신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서산에선 이재용 농장장, 논산에선 이경필 농장장을 만났다. 10여년 전 맺었던 인연으로 그들이 너무도 반가웠고, 감정도 애틋했다. 하지만 다 스러져가는 축사시설과 피폐해져만 가는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노후생활을 눈여겨보자니 답답함도 밀려왔다. 정부지원이 필수적이란 사실을 새삼 알았다.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난 대전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선 남용균 전 축협조합장을 만나 자리를 같이 했다. 아마 그 자리에서 난 노무현 후보의 행태를 맹비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 후보가 당선돼선 안되는 이유로 그가 민주당 간판을 미적거리며 ‘국민의 후보’를 내세우는 것을 비꼬아 ‘패륜아’라고도 욕했다. “행정수도 아이디어 역시 즉흥이고 졸속이다. 표를 얻기 위한 발언이다. 대전이 통일수도가 될 수 있는가”라며 노 후보를 한없이 공박하는 말을 쏟아낸 것으로 기억한다. 이 자리에서 할 소리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어찌된 운명인지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개탄한다. 다시는 반복돼선 안될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난 그리 유명을 달리한 그와 경쟁했던 이회창 후보를 위해 그해 12월12일 한나라당 중앙당사에서 전국 축산인들의 지지선언을 이끌어냈다. 이어 13일엔 이 후보와 음성 나환자촌 식구들의 면담을 이뤄냈다. 울산 현대호텔에서 열린 '음성나환자 정착촌 축산발전대회' 형식이었다. 그곳에서 이 후보는 “여러분과의 만남을 통해 어려운 삶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돼 큰 감명을 받았다. 최대한 돕겠다”고 말했다. 나환자 정착촌 축산인들을 도울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난 다음날 다시 강원도로 넘어 가 이 후보의 선거지원운동을 마무리 짓고 제주로 내려왔다. 15일 일요일 제주에서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하지만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선거법 위반 공판이었다. 16일 첫 공판에 임했다. 예상대로 내 상대방이었던 현직 지사는 검사의 심문에 모든 걸 부인했다. 법정에서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잡범과 뭐가 다른가? 저런 자를 지사라고···.” 그저 그렇게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12월19일 16대 대선결과가 나왔다. 이회창 후보의 57만표 차 낙선-. 의외의 결과였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요즘 시쳇말로 ‘멘붕상태’가 왔다. 말을 잃었고 신문과 TV도 멀리하기 시작했다. 삶의 사각지대. 그랬다. 내 삶을 스스로 뒤켠으로 내몰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정신적 공황상태는 상당히 오래 지속됐다. 하지만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뒤 이 후보를 지지해준 제주도민 지지자와 전국 축산인 음성나환자촌 정착민들에게 감사서신을 보냈다. 해야 할 도리는 해야 했기에 그랬다. 하지만 속으론 약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후 마음을 추스리는 한편 내가 현시점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숙고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후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 전국 각 지구당 위원장에게 공개서신을 보냈다.

 

 

세가지로 요약된다. “그동안 우리 정치구태의 모든 책임은 한나라당에 있다. 한나라당이 국민에게 고백성사를 해야한다. 세대통합적인 정당이 돼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중도보수의 당 노선을 확실히 선언해야 한다. 국회의원에게 끌려 다니지 말고 당원평의회를 만들어 패거리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그 시절 내가 한나라당에 갖고 있던 직함인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 자격으로 소리냈다. 그런 소신은 이후 2004년에 초에 이르러 한나라당이 ‘차떼기 정당’이란 욕을 먹을 즈음에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세 전직 대통령에게도 결국 편지를 쓰도록 만들었다. “차떼기는 세분의 유산이다. 그 책임이 세 분에게 있다는 걸 밝히고 국민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함으로써 이 나라 구태정치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그런 요청을 받아들일 리 만무지만 나로선 그저 침묵할 수 만은 없었다.

 

2002년 12월31일. 그 시절 내 비망록을 보면 많은 회한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도약하는 제주의 21세기를 설계했던 내 꿈이 6월의 지방선거로 좌절됐고, 이회창 후보의 당선으로 축협 부활은 물론 농협을 그 주인인 농민에게 되돌려 주려고 했던 꿈까지 모두 물거품이 돼 버린 것이다.

 

"제주와 서울을 잇는 모든 수고가 좌절됐다. 뒤돌아보면 내 삶은 도전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내 나이 60이 다 돼 ‘노후대책’이 내 삶에 끼어들리란 건 생각조차 못했다.“

 

그 시절 내 비망록엔 그런 메모가 적혀 있다. 2002년 직·간접적인 두 번의 선거패배로 노후대책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아무 대책 없이 달려만 갔던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러다 보니 한 일화가 있다. 과거 농림부 차관을 지낸 서울법대 출신 조익래 전 경남지사는 내가 농림부 축산국장 시절 ‘사수와 조수’ 관계로 불렸다. 언론인들 사이에서 그렇게 회자됐다. 그가 차관보 생활을 할 때 난 축산국장과 기획관리실장을 했고, 그만큼 그와 나의 관계는 끈끈했다. 그런데 내가 축산국장이던 시절 그가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신 국장! 너처럼 살면 안돼. 노후도 좀 대비해라.” 그런 말을 했다. 솔직히 귀에 안 들어왔다. 그런데 2002년 한해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 보니 진정 노후가 내 안중에도 없었고, 사전에도 없었고, 현실에도 없었다. 남아있는 걸 보니 그저 가족과 사랑이 전부였다. 내가 태어나 60년간 만들어 놓은 건 그게 다였다.

 

 

“모든 걸 시간에 흘려보낸다. 지나간 시간에 발목 잡히는 게 아니라 오는 시간에 내 삶을 띄우자.”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마침 그 시절엔 인체유전자 지도의 종합판인 게놈(genome)이란 용어가 대유행하던 시기였다. 유전자 지도가 모두 완성되면 인간수명이 120살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혼잣말로 “그러면 난 노인이 아니다. 이제 중반인데···. 한번 새로 살아보자.” 그런 마음가짐으로 초라한 마음을 추스렸다. 그러나 한편으론 1993년 말 제주도지사에 부임하고 나서 여러 일을 거치면서 내가 그동안 만들었던 삶이 어긋나고 찢겨진 것이 원망스러웠다. 93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회한이 밀려왔다.

 

“그때처럼 당당한 삶이면 얼마나 좋을까?” 2002년의 끝자락인 31일 한낮 혼자 거실을 청소하고, 헝겊에 약품을 발라 응접세트와 소파의 묵은 때를 지워내며 심란한 생각을 떠올리다 그만 왈칵 눈물이 솟고 말았다.

 

2003년 1월 난 모든 신년행사에 가지 않았다. 그럴 낯짝도 없었다. 그해 1월 처음으로 한 일은 하나였다. 경기도 과천의 아파트를 아내 이름으로 바꿨다.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시절 경기도 과천으로 농림부가 이전해 갈 때 특별분양 받아 마련한 재산이다. 그걸 아내명의로 옮겼다. 60평생을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선물할 수 있는 유일한 재물이었기 때문이다. 45평짜리 아파트다.

 

그 시절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것도 내가 만든 재산이 아니었다. 1970년대 제주에서 농림부로 옮겨 돌아가신 장모님께서 사주셨던 방 하나뿐인 14평 짜리 일제 적산가옥에서 살다 난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내가 미국에서 생활하던 사이 아내는 과외교습으로 돈을 벌었다.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의 아들도 아내가 가르쳤다. 그 시절 난 미국정부로부터 매달 생활비조로 미화 375달러를 받았다. 그 중에서 난 무조건 200달러를 툭 떼어내 우편환으로 아내에게 보냈다. 생활비나 보태 쓰라는 것이었는데 귀국해 보니 아내가 과외교습으로 번 돈과 내가 부친 돈, 농협 대출금 100만원으로 옥인동에 떡하니 주택을 마련한 것이다. 건평 20평에 대지 50평짜리 집을 보여줬다. 너무도 기뻤고 아내의 그런 살림솜씨가 밑천이 돼 불린 재산이 과천 아파트였기에 어찌 보면 그걸 아내의 명의로 바꾼 건 그저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준 것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연초부터 이상한 음모가 진행되는 낌새가 있었다. 그동안 말이 없더니 느닷없이 연초부터 “도민화합 차원에서 신·우 간 갈등을 종료해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현직 지사 측에서 진실에 상관 없이 화합에 동의하지 않으면 신 지사님을 철저히 고립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는 주변의 전언이 이어졌다. 혼자 읊조렸다. “바보같은 사람들! 나는 더 잃을게 없는데 ··· 더욱이 제주에 대한 꿈도 버렸다. 내가 뭐가 더 있다고 자기들이 날 해코지한단 말인가?” 그랬다. 그 때 난 정말 고향 제주를 위한 헌신의 마음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 때 내가 필요한 건 오로지 재판과정에서 진실을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그런 음모에 가담하는 자들이 진실규명을 위한 진심을 갖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음모는 연우회(緣友會)로도 번졌다. 연우회는 전직 도지사와 교육감, 제주대 총장을 지낸 이들이 ‘인연을 잊지 말자’며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이다. 그 가운데서도 막연한 화합을 주장하는 글을 언론에 게재한 이가 있기에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은 이상 나로선 그 모임도 갈 처지가 못 됐다. 그저 자중하자는 생각이었다.

 

2003년 1월27일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3차 공판이 열렸다. 나와 맞붙었던 현직 지사의 5촌 조카를 증인으로 신청, 그를 증언대에 세웠다. 친척인 지사를 돕고자 증언에 애썼지만 그는 계속되는 검사의 신문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슬슬 음모의 밑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선거법 위반 피의자로 만들고자 현직 도청 간부와 하위 공무원, 현직 지사.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당시 지역신문인 H일보의 강모 회장까지 나를 성추행 사건의 배후세력이자 선거법 위반 피의자로 만들기 위한 음모에 깊숙이 개입하는 등 공작의 냄새가 그날 풀풀 배어 나왔다. 재판과정에서 숨기려 했지만 어설프게 드러나 버린 현직 지사의 조카 한모씨의 언행이 그랬다.

 

그러던 때였다. 제주대 양영철 교수 등 교수 100인의 성명이 불거져 나왔다. “현 지사와 신구범 전 지사가 도민에게 사과하고 둘은 화해하라”는 권고성 성명이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치려 하는 지 감이 잡혔지만 말을 아꼈다. 그나마 뒤이어 2월10일 제주참여환경연대에서 반박성명이 나와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 같은 고마움이었다. 참여환경연대의 반박성명은 “재판중인 사건에 대해 교수들의 성명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지금 도민이 바라는 건 두 사람의 화해가 아니라 성추행과 불법선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다. 현재의 갈등은 통합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의 부도덕성에 기인한 것이다.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이 지금 필요한 것이다.” 그들과 교감은 없었지만 그게 당시 내 입장이다. 하지만 현직 지사자리를 꿰찬 이는 기다렸다는 듯 “100인 교수 선언을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조직된 단체였던 ‘감귤살리기 운동본부’ 대표들이 그를 찾아간 자리에선 나와 가까운 강지용 제주대 교수를 통해 “신구범을 만나게 해주라”는 요청까지 했다. 마치 치밀하게 각본이 짜여진 듯 모양새 갖추기에도 신경 쓰는 눈치였다.

 

 

그해 2월12일. 막내 아이 용준이가 서울대 의대 예과에 입학한 지 12년 만에 졸업을 했다. 내가 서울에서 공직생활을 하던 때 먼저 제주로 내려와 할머니와 생활하며 오현고를 마친 녀석이다. 그런 그 녀석은 대학을 진학할 때까진 나를 흡족하게 했다. 예과 2학년 시절엔 컴퓨터를 공부해 교재를 만들어 오히려 교수를 가르친 아들이다. 하지만 이른 바 ‘족보’(기출·예상문제집)를 통해 시험공부를 하는 걸 “진정한 의사가 아닌 돌팔이 의사가 될 경로”라며 거부, 내 속을 썩이더니 대학 3년 시절 보기 좋게 ‘낙제’가 돼 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녀석이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남들은 예과 2년, 본과 4년을 합쳐 6년으로 끝낼 일을 12년이나 대학에 매달린 것이다. 결국 막내는 지금 의사의 길을 걷지 않고 있다. 인턴생활을 하다 하루는 “의사들은 나쁜 사람입니다. 전 그런 일 못하겠습니다”라고 때려 치우더니 “제가 공부를 해서 인간복제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증명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 텍사스 공대로 갔다. 그러더니 재작년 5월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코넬대에서 포스트닥(박사후 연구과정)을 밟고 있다. 아들 녀석들이 하나 같이 ‘고래 심줄’ 기질을 물려받은 느낌도 든다.

 

그해엔 막내아들의 졸업 말고도 나에게 기쁜 소식이 또 있었다. 뒤늦게 사법고시에 패스, 예비판사의 길을 걷던 큰 아이가 정판사가 됐고, 외교관의 길을 포기하고 미국계 컨설팅사에 다니던 둘째는 시티뱅크의 수석부장 자리로 옮겼다. 아들 녀석 셋이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들이 잘 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상념에 잠겼다. 행복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이 이리 성장하고 있는데 나는 내 삶을 접어가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구나”란 회한이 그저 마음 한 구석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저 가족들이 모여 웃음꽃을 피우는 게 낙이었다. 어떨 땐 큰 아이가 “아버진 이제 퇴직자연합회에서 일할 기회를 찾아보시라”고 농담을 건네면 “야 임마! 57세가 대통령 되는 세상이지만 내가 갈 길은 아직 남아있다. 무시하지 마”라며 웃음속에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편했다. 세상도 잊어버리고 그냥 가족들과 아웅다웅도 하고, 오순도순 소리내며 소소한 행복을 알콩달콩 누리던 그 시절이 그리도 좋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법재판에 내던져진 내 운명은 이제 그만 손을 놓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분연히 맞서야하는 기구한 내 운명이 또 시작된다. <39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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